[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본회퍼, 오해와 편견 (13)
자국 문화에 대한 국수적 자긍심의 정도 차이가
한국과 일본 양국의 기독교인 수 차이 만들었나
민족주의적 사고 퍼질수록, 기독교 신앙 멀어져
◈기독교 선교와 일본 문화: 존왕양이, 부국강병, 자주적 근대화에 가로막힌 선교
일본의 가톨릭 선교는 1614년 도쿠가와 막부의 금교령으로 거의 완벽하게 좌절되고 만다. 이후 약 200년 넘게 일본 내에서는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기독교인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펼쳐진다.
그러다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1853년과 1854년 각각 4척과 9척의 증기함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일본에 입항하였고, 일본은 미국의 해군력에 압박을 느껴 4년 뒤인 1858년 불평등 조약인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고 개항에 합의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집권 시기 이후 200년 넘게 지속된 해금정책이 철폐된 것이다.
개항이 이루어지자마자,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일본 내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1859년 미국의 영국국교회 목회자 채닝 무어 윌리엄스, 그리고 미국성공회(영국국교회로부터 시작, 미국에서 독립적으로 자리잡은 교단) 목회자 존 리긴스가 나가사키 항에 도착하여 전도 활동을 시작했고, 같은 해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커티스 헵번이 요코하마 항에 도착해서 의료 선교를 개시했다.
험난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전도를 통해 일본 내 기독교인 수는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이 기독교 선교의 길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조슈 번과 사쓰마 번 등 일본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지사(志士)들은 대규모 내전인 보신전쟁(1868-1869)을 일으킨다.
그들은 이 전쟁을 통해 구시대적 사고에 갇혀 실정을 거듭하던 도쿠가와 막부를 전복하고 존왕양이(尊王攘夷, 일왕을 높이고 서구 오랑캐를 배척) 사상을 모토로 삼는 신정부를 수립했다. 이것이 일본의 천황제를 회복시킨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8)이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알려진 정한론자 대부분이 이 조슈 번이나 사쓰마 번 출신 지사였다. 대표적으로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를 주도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바로 조슈 번 출신 존왕양이 지사였다.
이들은 서구의 근대 과학문명과 정치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일본화된(Japanized) 새로운 근대문명을 건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일본은 나름의 자주적 근대화에 성공하며, 불과 30여년만에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열강으로 탈바꿈했다.
이렇듯 국제정치 감각을 가졌으면서도 국수주의적인 지도층이 자주적 근대화 및 부국강병에 성공한 까닭에, 메이지 시대의 일본문화 전반에는 서구문화를 선호하면서도 배척하는 이중적인 태도가 팽배해졌다.
부국강병에 꼭 필요한 서구 문물은 적극 받아들였지만, 일본의 문화적 자존심과 고유의 정신문화를 건드릴 만한 서구 문화나 사상에 대해서는 매우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렇게 일본인들이 거부했던 서구적 요소 가운데는 기독교 신앙도 속해 있었다.
일본인들 입장에서 기독교 신앙은 부국강병과 자주성 확립에 저해되는 요소로 여겨졌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대대로 무력과 힘을 존중하던 패권적 군국주의 사회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메이지 시대는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이 되기 위해 국가적 자긍심을 최대한도로 드높이려 애쓰던 시기였다.
이런 일본인들의 눈에 겸비, 헌신, 회개, 순종의 정신을 요구하던 기독교 신앙은 탐탁치 않게 여겨졌다. 또한 서구로부터 전해진 신앙에 자신들의 마음을 내맡겨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만큼 당시의 일본은 국가적 자존심, 문화적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상태였다. 때문에 개항과 근대화 시기 일본에 열린 새로운 개신교 선교 기회는 큰 결실을 내지 못했다.
◈기독교 선교와 한국문화: 고난의 시기 덕에 열린 선교의 기회
유사한 시기 한국은 일본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서양인 선교사들의 기독교 선교에 반응했다.
원래 조선도 도쿠가와 막부 당시의 일본 못지않게 심하게 가톨릭 교인들을 박해했다. 18세기 후반 청나라로부터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조선에 유입된 후, 남인 계열 선비들(정약용, 정얀전 등의 실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음) 중심으로 서학, 혹은 천주학이라는 이름으로 가톨릭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19세기 내내 개항 전까지 조선 천주교회는 끊임없는 박해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1866년의 병인박해 당시에는 프랑스인 가톨릭 사제 9명이 조선 정부의 프랑스 귀환 권고를 거부하고 조선 천주교인들과 같이 사형을 당했고, 이 일이 원인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발하기도 했다. 사실상 한국도 일본만큼이나 기독교 신앙에 대해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입장을 고수했던 것이다.
서구 문물과 사상, 종교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러한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입장, 국수주의적 자긍심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서구 열강들에 의해 청나라와 조선이 망국의 길로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일본과 달리 조선은 19세기 내내 국력을 갉아먹던 세도정치의 여파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주적 근대화를 제대로 시도해보지 못한 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급격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 일본의 침탈을 견제하려 미국과의 관계 구축에 힘쓰던 조선 조정에 의해 미국인 선교사들의 전도활동이 허용되었고,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하면서 국내 선교가 본격화되었다.
그 후 국운이 급격히 기울면서, 그리고 소중화(小中華)로서의 문화적 자부심이 무너지면서 조선 민중은 점차 서구로부터 전파된 기독교 복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자국의 정치와 문화가 자신들의 삶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체감하면서부터, 기독교 신앙을 통해 소망을 발견하려는 이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현재 일본은 전체 인구의 1%만이 기독교인이다. 그것도 천주교와 개신교를 모두 합쳐서 그러하다. 반면 한국은 천주교와 개신교 인구를 모두 합쳐 1,300만명, 비율로 따지면 약 25%가 기독교인이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인 비율에 차이가 나는 원인은 다양하다. 하지만 양국 개신교 선교 역사를 되돌아볼 때, 자국 문화에 대한 국수적 자긍심의 정도를 이러한 차이의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하는 데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 양국 모두 19세기 중후반까지 가톨릭교 선교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일본은 스스로의 부강함과 문화적 역량에 심취하면서 서구로부터 전해진 기독교의 복음을 지속적으로 거부한 반면, 한국은 국가의 쇠락과 자국 문화에 대한 환멸이 심해지면서 기독교의 복음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태도 차이가 양국 선교 결과의 차이를 불러온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 입장으로 볼 때, 한일 외교분쟁 와중에도 <귀멸의 칼날>과 같은 왜색 애니메이션이 극장가에서 상당한 성적을 거두는 것을 보면, 다소간 갑갑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는 단순히 반일감정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과 복음과 문화에 대해 수백 년간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던 일본 문화에 대한 한국인들의 암묵적인 호응과 선호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인들은 외교분쟁 직전까지 일본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일본여행과 일본 취업에 열심을 내던 전력이 있다.
일본과의 비생산적인 외교 분쟁과 그로인한 민간 차원의 교류 및 협력이 가로막히는 데 대해서는 상당한 아쉬움이 있지만, 태생적으로 반기독교적 성향을 가진 오늘날 일본 문화에 한국인들의 정신이 잠식되어 가는 것 역시 우려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본회퍼는 독일의 극단적 국수주의, 자민족 중심주의, 순혈주의인 나치즘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지탄했다. 그는 20세기 초 독일 민족 전반에 보이던 이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국가주의 사고가 인간 죄성이 극단적으로 현실화된 모습이라고 비판했다.
인간의 사고 바깥에서 보여지고 들려오는 하나님의 계시행위를 묵살하려 하는 인간의 폐쇄적인 속성, 루터의 표현을 빌어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마음”은 자기 바깥의 것, 자기와 다른 것, 타자성에 대한 맹목적 거부감과 지배욕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 극단적 사례가 바로 나치즘이라는 것이다.
이 나치즘 못지않게 국수적이고 폐쇄적이며 자민족중심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고가 일본식 군국주의였고, 이러한 사고는 오늘날 일본의 정신문화 및 대중문화 전반에 여전하게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서 제작된 대부분의 문화 콘텐츠는 때로 반전(反戰)의 정신과 휴머니즘을 담아내고 있지만, 그런 경우조차 일본적인 것에 대한 국수적 자긍심을 짙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오늘날 한국 정계 및 문화계 내부에 팽배한 민족주의적 태도와 대단히 유사하다. 이런 사고방식이 사회 전반에 편만하면 할수록, 사람들의 관심은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멀어질 위험성이 있다.
한국 민족 역시 원래는 기독교 복음에 배타적이고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데 열심을 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이런 위험성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한국인들은 20세기 들어와 국가의 쇠락과 멸망, 그리고 한국전쟁 등으로 점철된 극한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 잠시나마 외부로부터 전해진 기독교 신앙과 복음에 열성적으로 자기를 개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전 어느 시기보다 국가경제 규모가 커지고 대중문화 부문에서 나름 세계적 인지도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현재, 한국 사회 전반에는 이전의 자민족 중심주의, 배타적 사고로 회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반일감정에도 불구하고 일본 문화에 대한 한국인들의 암묵적인 선호도가 높은 데는 이러한 이유도 일정 부분 작용하는 듯하다. 자국의 국력과 문화적 자긍심에 심취하는 태도에 있어, 일본은 한국의 선배 격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