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본회퍼, 오해와 편견 (15)
한일 양국 문화 속, 자기중심적 민족 이념의 덧없음
기독교 신앙과 한민족 이념의 연합 불가피했겠지만
민족 이념 치우친 기형적 복음 양산 정당화 못할 것
◈민족 이념의 득세: 20세기 한일 양국에서 민족 이념의 힘
19세기 중후반부터 2021년 현재까지, 민족 이념은 한국과 일본 양국의 근현대사 전반에 걸쳐 각각의 정신문화를 포괄적으로 지배하는 사고로 군림해 왔다.
두 나라의 민족 이념은 겉으로 보기에 그 양상이 크게 달랐다. 일본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적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공세적 양상을 보였고, 한국의 민족주의는 국가 멸망의 현실 앞에서 생존과 정체성 보존에 사력을 다하는 수세적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양측 모두 자국 민족의 이익과 번영을 절대선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민족의 이름으로, 민족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이라도 정당화되는 이런 사고는 극단적으로 폐쇄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게다가 ‘민족’이라는 개념의 정체 자체도 모호할 때가 많아서, 대개의 경우 민족 이념은 실제 그 민족 구성원 다수의 생존과 행복이 아니라 소수의 지배층이 누리는 권력과 이권을 보장하는 허울좋은 명분으로 활용되곤 했다.
대중문화 콘텐츠는 이 민족 이념을 고취시키는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주로 활용되곤 했다. 특히 미디어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일반 대중의 문화 콘텐츠 접근성이 무한대로 확장되면서,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대중문화는 민족주의 정서를 고취시키는 최선의 방편으로 여겨져 왔다.
일본 시대극이 일본 전통문화를 극단적으로 미화해서 그 우수성을 앞세우고, 일본 메카닉 애니가 일본 전자기술과 기계기술의 우월성 홍보에 앞장섰던 것과 같이, 한국의 시대극은 한민족의 일방적 선량함과 고상한 선비적 도덕성을 내세우고, 한국의 현대 일상을 배경으로 삼는 드라마들은 오늘날 한국인의 열정적이고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광고하는 데 열심이다.
그러나 양국의 삶의 현실을 주의깊게 살펴볼 때, 과연 한일 양국의 대중문화 콘텐츠가 한껏 분칠해서 표현한 것처럼, 두 나라 민족의 정신문화와 인격적 자질이 그렇게 훌륭하고 출중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럽다.
20세기 한국에서 ‘민족’이라는 단어는 주술과도 같은 힘을 가진 용어였다.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신앙마저 민족을 위한다는 명분이 없으면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일제시대 한국 기독교계가 나라 잃은 한민족을 기반없이 유리하는 이스라엘 민족에 비유하면서 국권 회복을 위한 기도에 전념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기독교계 내에 침투한 이 폐쇄적이고 맹목적인 민족 이념은 오늘날까지 한국교회 곳곳에 남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전광훈 목사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가 설파하는 것 같은 기형적인 형태의 정치적·민족적 신앙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숙을 가로막는 큰 걸림돌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한국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유념한다면,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 이념의 연합은 일정 부분 불가피했던 면이 있다. 그러나 이런 불가피성이 민족 이념에 치우친 기형적 복음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한국교회의 형성과 성장에 민족 이념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 기독교 선교가 막 시작될 무렵 네비우스 선교 전략이 큰 효과를 거두었지만, 그렇다고 한민족을 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설파할 성경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복음은 인간을 더 이상 민족 단위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민족 이념의 앞날: 민족이 사라지는 현실에서 민족 이념의 덧없음
본회퍼의 신학은 이 점을 힘써 강조한다. 본회퍼는 그의 저서 <성도의 교제>와 <창조와 타락>에서 기독교의 복음이 사람을 민족의 일원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개별적인 인격으로 바라본다는 점을 치밀하게 논증한다.
기독교 복음이 가르치는 신-인 관계, 그리고 인격 대 인격 관계의 가장 온전한 원형은 창세기 에덴동산 기사 속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담과 여자의 관계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최초의 온전한 인격 대 인격 관계였다. 이 두 사람은 단순히 부부 혹은 돕는 배필 이전에, 서로가 서로에게 절대적인 타자성을 확보한 개별 인격이었다.
서로를 사랑하지만 상대를 지배하지 않고 대상화하지 않는 관계, 서로가 서로에게 초월적인 존재자임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상대를 실천적으로 존중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관심 안에 두신 아담과 여자에게 기대하는 인격적 관계였다.
본회퍼의 교회사회학은 바로 이 원초적 인간관계를 어떻게 죄악이 관영한 우리 현실에 펼쳐나갈지 고민하는 논의이다. 그래서 그의 신학사상 속에서는 민족 이념이 해체의 대상으로 지목된다.
독일의 극단적 민족 이념이 조장하는 수많은 인종범죄의 현실을 목도했던 본회퍼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통해 다수의 개별 인격을 무리짓고 갈라치는 행태를 인간의 가장 악질적인 죄성, 원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지목한다.
기독교 복음의 입장에서 독단적이고 맹목적인 한민족 중심주의, 한민족 우월주의는 단지 복음 전파의 장애물일 뿐 아니라, 고질적인 죄악으로도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민족주의가 결코 절대선이 아닐뿐더러, 일반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에도 정의롭지 못하고 허구적이며 기만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만일 한민족이 우리 민족 이념이 가르치는 것처럼 학구적이고 고고하고 선량한 성품을 가졌다고 한다면, 같은 민족 구성원을 조직적으로 노예화하는 가혹한 노비제도가 19세기 말까지 존재했던 사실은 설명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미국이 1863년에 이르러서야 흑인 노예들을 해방했던(그것도 실질적으로가 아니라 거의 명목상으로) 사실을 지탄하고 그 야만성에 조소를 보내지만, 조선 역시 미국 남부 흑인 노예제도에 못지않은 가혹한 노비제도를, 그것도 자민족을 조직적으로 노예화하는 제도를 1886년까지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임진왜란 당시 한양 도성 백성 상당수가 왜군 입성을 환영하고 노비 문서부터 불지르려 했던 것이나, 일제강점기 직전까지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상민들과 노비들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환영했던 사실 역시 우리 민족 이념의 윤리적 허구성을 보여준다.
일제의 식민지 치세도 정의롭지 못했지만, 그 이전에 한민족 지배층의 자민족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압제가 일제 식민지 치하 압제보다 여러모로 더 심각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민족 개념은 신봉하면서 그 민족에 속해 있는 현실의 이웃과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고 오히려 착취하고 압제하는 데 몰두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민족 이념인가?
전체주의적 악습과 갑질문화가 팽배한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진지하게 제기해야 할 물음이다. 인격 대 인격 관계를 망각하고 내세우는 민족 이념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기독교적 반성이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민족 이념은 윤리적 차원에서도 허구적이지만, 존재적 차원에서도 점차 허구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한국의 인구 전망과 연관되어 있다.
민족 이념을 지탱할 민족 구성원 자체가 사라질 가능성이 농후한 현재의 대한민국 인구 상황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그토록 떠받들어 온 한민족의 민족주의는 사실상 신기루나 다름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민족 이념은 문화적으로 볼 때도 이율배반적이다. 국민 대다수가 이 민족 이념에 의거해서 반일을 외치는 와중에, 극장가에서 <귀멸의 칼날> 같은 작품이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은 사실상 한일 양국의 민족 이념, 특히 한국의 민족 이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체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의 민족 이념은 일본의 민족 이념과 본질적으로 매우 유사하고, 그렇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 양국이 서로 반목하는 가운데서도 문화적인 공감대 형성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윤리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민족 이념이 기준이 되는 사회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심각한 모순에 처하게 된다. 눈앞의 이웃은 사랑하지 못하면서 정작 그 이웃을 포괄하는 민족이라는 우상만을 숭배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이런 어리석음을 버리도록 이끈다. 민족이라는 관념적 집합기호가 아니라, 삶의 직접적인 현실에서 마주치는 세계 열방의 사람을 마주하고 존중하고 구원으로 초대하도록 가르친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