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너무 이상하고 놀라우신 성자 예수님의 5가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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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목사 설교] 부활절 아침에

본문: 요한복음 1:14, 누가복음 2:5-7, 마태복음 2:10-15, 8:20, 마가복음 10:45, 빌립보서 2:6-8
장소: 강변교회(2021년 4월 4일 부활절)

▲김명혁 목사. ⓒ크투 DB

▲김명혁 목사. ⓒ크투 DB

제가 지난 2020년 12월 2일 아침 침대에 누워 성자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성자 예수님께서는 너무너무 이상한 삶을 사신 놀라우신 분이시라는 묵상을 하면서,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놀라우신 성자 예수님의 삶의 모습’에 대한 설교를 전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2021년 4월 4일 부활주일 강변교회에 와서 처음으로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놀라우신 성자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성자 예수님의 이상하시고 놀라우신 삶의 모습 5가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기를 원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셔서” 세상으로 “찾아오신” 참으로 이상하시고 놀라우신 삶을 사시기를 시작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빌 2:6-8).

여기 “자기를 비어”라는 말씀은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셨고” 결국 자기를 “포기하셨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셔서” 세상을 “찾아오시되” 태어나실 곳이 없어서 “구유”에 태어나셨다고 했습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6,7).

이 세상의 왕자나 부자의 아들들은 물론이고 보통 사람의 아들들도 말과 소가 사는 구유에서 태어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셔서” 세상에 “오셨을” 때, 태어나실 곳이 없어서 말과 소가 사는 “구유”에 태어나실 정도로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너무너무 놀라우신 분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태어나시자 마자 헤롯 왕의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피난 생활”까지 하신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너무너무 놀라우신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2:13-15).

성자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버림”과 “떠남”과 “찾아감”과 “피난”의 삶을 사셨고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삶을 사셨다는 것은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너무너무 놀라우신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셔서” 세상에 “찾아오시는데” 그치지 않으시고 찾아 오신 곳의 사람들처럼 즉 죄인들처럼 “되시는” 삶을 사시고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사시는” 삶을 사신 참으로 이상하시고 놀라우신 삶을 사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성자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닌 “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죄인과 같이 “되셨고”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사셨다” 라고 성경은 지적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 8:3).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0,11).

사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병자들과 죄인들을 주로 찾아 다니시면서 저들을 도우시면서 저들과 “함께 사셨는데” 그 이야기가 마 8장과 9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마 8:1-3).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5,36).

죄인들과 같이 “되시고” 죄인들과 “함께 사시는” 성자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너무너무 놀라우신 삶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가난하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보시고 이 세상의 사람들처럼 가난하게 힘들게 “되셔서” 가난과 힘든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사실 성자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기까지 가난한 부모 아래서 “가난”과 “고난”을 지니고 사시다가 “가난”과 “고난”을 지니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가난”과 “고난”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성자 예수님께서는 나중에는 온갖 죄만 짓다가 잡혀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는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되는 극심한 죄인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성자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극심한 죄인 취급을 받으시는 죄인이 “되셔서” “사시다가” “죽으셨다”는 사실은 너무 이상하시고 너무 놀라우신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자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극심한 죄인 취급을 받으시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면서 자기를 몽둥이로 치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악독한 죄인들의 괴수들인 로마 군인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사죄의 기도를 성부 하나님께 드리시는 일까지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이와 같은 성자 예수님의 사죄의 기도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애를 써도 우리 죄인들은 물론 하늘의 천사들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말 이상하시고 정말 놀라우신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정말로 본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찾아간 곳의 사람들과 죄인들처럼 “되려고” 소원하는 비천하고 불우한 삶을 저들과 “함께”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복음을 위하여 종이 “되었고” 유대인과 같이 “되었고” 율법 아래 있는 자와 같이 “되었고”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고” 약한 자와 같이 “되었고” 여러 모양이 “되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고전 9:19-23).

성자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고 본 받으려는 사람들은 백인이 흑인이 “되는” 삶을 살게 되고,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이 “되는” 삶을 살게 되고, 한국 사람이 태국 사람이 “되는” 삶을 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는 본래 앗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가난한 거지가 “되었고” 병든 나환자가 “되었고” 고통을 몸에 지닌 고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은 나병환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가난”과 “고난”과 “죽음”을 귀중히 여기고 사모하면서 저들과 “함께” 살다가 순교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자기와 다른 불우한 종류의 죄인들과 같이 “되는” 삶을 살고 그리고 저들과 “함께” 사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자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천국 성자의 모습을 모두 “버리시고” 세상에 “찾아오셔서” 죄와 허물과 병으로 가득한 죄인들과 같이 “되셔서” 죄인들과 “함께 사시다가” 죽으신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너무너무 놀라우신 삶을 사시다가 죽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셔서” 세상에 “찾아오셔서” 죄인들처럼 “되시는”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사시는” 참으로 이상하시고 참으로 놀라우신 삶을 사셨는데, 여러 종류의 못된 사람들과 “함께 사시면서” 여러 종류의 못된 죄인들에게 “사랑과 섬김”의 따뜻한 손길을 펴시면서 사시는 정말로 이상하시고 정말로 놀라우신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께서 “사랑과 섬김”의 귀중함을 강조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성자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사람들보다는 병든 자들에게,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에게, 평안한 사람들보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그래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저들을 찾아가서 어루만지시면서 병을 고쳐주시고 죄를 사해주시고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시는 참으로 이상하시고 참으로 놀라우신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13).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아주 귀중하고 아주 이상하시고 아주 놀라우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든 사람들보다는 건강한 사람들을 더 좋아하고 죄인들보다는 의인들을 더 좋아하고 마음이 상한 자들보다는 마음이 평안한 자들을 더 좋아하는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정 반대로 건강한 사람들보다는 병든 사람들에게 쓸데 있는 분으로,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을 부르시는 분으로, 그리고 마음이 평안한 사람들보다는 마음이 상한 자들을 부르시는 분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성자 예수님께서는 근심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신 다음 저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채워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

그러면 이제부터 성자 예수님께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도저히 펴실 수 없는 버림받아 마땅한 극심한 병자들과 죄인들에게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신 사실 다섯 가지를 간단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①성자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제일 먼저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신 사람은 그 당시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간주하고 멸시하던 문둥병자였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지라”(마 8:2-3).

②성자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두 번째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신 사람은 이방인 백부장이었습니다.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 8:5-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성자 예수님께서는 민족의 원수와 같은 로마 백부장에게 지나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셨고 그를 지나치게 “칭찬”하셨습니다.

③성자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신 사람은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창녀였습니다.

분노와 증오에 찬 군중들에게 둘려 쌓여 돌에 맞아 죽게 된, 두려움에 쌓여 벌벌 떨고 있던 창녀를 향해서 성자 예수님께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사실 간음 현장에서 잡힌 사람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놀랍게도 성자 예수님께서는 돌에 맞아서 죽게 된 창녀를 바라보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난 군중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④성자 예수님께서 네 번째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신 사람은 일곱 귀신 들렸던 인간 쓰레기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눅 8:2).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세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일곱 귀신 들려서 미쳤던 사람이었다는 해석과, 길거리의 부도덕한 창녀였다는 해석과, 일곱 가지 죄악에 사로 잡혔던 전형적인 죄인이었다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인간 쓰레기였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과 축복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그와 같은 행동은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판단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지나친 이상하고 놀라운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안락사 시켜야 마땅한 인간 폐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귀신의 쇠사슬에서 건져내셨고, 윤락의 늪에서 건져내셨고, 죄악의 덫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⑤성자 예수님께서 다섯 번째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신 사람들은 다시 말씀 드리지만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던 로마 군인들과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던 행악자 강도였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중의 최고의 죄인들인 로마 군인들과 강도를 향해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죄의 기도를 드리셨고 다음과 같은 천국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너무너무 놀라우신 성자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로마 군인들의 대장인 백부장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눅 23:47).

저주받아 마땅한 극심한 죄인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성자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과 축복의 모습은 상식을 벗어난 모순되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자들은 물론 하늘의 천사들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드릴 수도 없는 모순되는 듯한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너무너무 놀라우신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다음 이틀 동안 무덤에 묻혀 계시다가 이틀 후인 주일 새벽에 부활하시고 부활하신지 40일 후에 하늘로 승천하신 참으로 이상하시고 참으로 놀라우신 삶을 사셨고 죽음을 죽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자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실 필요도 없으셨고, 죽으신 다음 이틀 동안 무덤에 묻혀있으실 필요도 없으셨고, 무덤에서 살아나실 필요도 없으셨고, 하늘로 다시 승천하실 필요도 없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주의 죽음을 당하는 일과 무덤에 묻히는 일과 무덤에서 살아나는 일과 하늘로 다시 올라가는 일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삶과는 너무너무 거리가 먼 정말 이상하시고 정말 놀라우신 일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일부러 취하신 일들이었는데, 자기 자신을 위해서 취하신 일들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빈 무덤.

▲빈 무덤.

저주받아 마땅한 우리 죄인들과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무덤과 지옥의 저주에서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시고 소원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고귀하신 사랑의 뜻과 성자 예수님의 희생적인 구원의 뜻과 성령 하나님의 간절하신 도우심의 뜻에서 비롯하신 너무너무 귀중하시고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너무너무 놀라우신 일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자 예수님의 무덤에서의 부활이 없었다면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몸들은 죽은 다음에 영원토록 무덤에 묻혀서 썩어지고 말게 되는 영원한 불행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무덤에서의 부활 때문에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신자들의 영혼들은 성자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무덤에 묻혀있던 시체들과 함께 살아나서 영혼들과 육체들이 함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세세토록 돌리는 하늘의 영광과 축복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축복에 대해 다음과 같은 귀중하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5-27).

사도 바울도 부활의 축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귀중하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0-24).

다섯째로,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심판과 저주에서 구원하실 구세주로 세상에 “초림”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다음 우리 죄인들을 영원한 하늘 집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다시 세상에 “재림”하실 성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볼 때 우리 죄인들은 성자 예수님의 망극하시고 영원하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에 놀라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흐리면서 쓸어지게 될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망극하시고 영원하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너무너무 놀라우시기 때문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망극하시고 영원하신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제자인 사도 요한은 “재림”하실 성자 예수님께서 이루신 영원하신 구원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면서 깊은 감동에 사로잡히고 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부터 22장까지 “내가 보니” “내가 보니” “내가 보니” 라는 고백을 계속해서 했습니다. 성자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하신 구원의 축복의 모습이 너무너무 귀중하고 놀라웠기 때문이고 우주적인 심판이 너무너무 놀라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계 4:1,2).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계 5: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 같이 말하되”(계 6: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계 7:9-12).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계 8:1,2).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계 9: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계 10:1).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계 11:15-17).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계 14: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계 15: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계 16: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1,2).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계 19:1,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1-7).

세상에 “초림”하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심으로 저주받아 마땅한 지구상의 온갖 죄인들을 구원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셔서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구원의 장면들을 보여주신 다음에 마지막에 세 번 반복해서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은 “재림”에 대한 말씀들이었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계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

결국 사도 요한의 마지막 답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1).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1).

성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받고,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의 마지막 답변과 기도는 다음과 같은 사도 요한의 마지막 답변과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1).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1).

“종말”의 관점에서 “재림”하실 성자 예수님 앞에서 우리들 자신을 바라보지 않을 때 우리들은 방심하게 되고 자만하게 되고 무책임하게 되고 타락하게 되고 낙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시는 “재림”의 성자 예수님 앞에서 종말의 관점에서 우리들 자신을 바라볼 때 부족한 우리들은 정신을 차리게 되고 겸손하게 되고 책임감 있게 되고 소망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재림”하실 성자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들의 소망의 극치이고 우리들의 영광의 극치입니다. “재림”하실 성자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들의 겸손의 비결이고 우리들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서머나의 폴리캅 감독도, 길선주 목사님도, 최권능 목사님도, 이성봉 목사님도, 주기철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재림”하실 성자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면서 고난과 환난과 핍박을 이기며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니고 죽도록 충성을 다하면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만독하고 암송하면서 천국을 사모하고 또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평생토록 “예수 천당”을 외치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살았습니다.

한국의 무디 이성봉 목사님은 밤에 자다가 옆집 방앗간에서 방아 찢는 소리만 들어도 주님이 오시는가 하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곤 하셨다는 간증의 말씀을 저는 중학생 때 12번이나 직접 들었습니다. 사실 이성봉 목사님께서는 한국의 최고의 부흥사였지만, 돈이나 재물에 대한 관심을 전혀 지니지 않고 거의 모든 사례비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면서 자신은 거지처럼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시던 손양원 목사님의 삶도 천국과 종말신앙에 의해 지배된 소망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가슴과 의지와 시선은 세상이나 세상의 안일에는 전혀 매이지 않았고 오직 천국과 내세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평안이나 명예에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을 애처로” “고난을 스승으로” “죽음을 소원으로” 삼으며 천국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옥중 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이 가사를 보면 그가 얼마나 간절히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 옵소서.”

우리도 다시 오실 재림의 성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재림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그리고 사도 요한처럼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처럼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1).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1).

이것으로 오늘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놀라우신 성자 예수님의 삶의 모습” 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첫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기를 원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귀중하신 뜻을 따라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셔서” 세상으로 “찾아오시는” 참으로 이상하시고 놀라우신 삶을 사시기를 시작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셔서” 세상에 “찾아오시는데” 그치지 않으시고 찾아 오신 곳의 사람들처럼 즉 죄인들처럼 “되시는” 삶을 사시고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사시는” 참으로 이상하시고 놀라우신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셔서” 세상에 “찾아오셔서” 죄인들처럼 “되시는”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사시는” 참으로 이상하시고 참으로 놀라우신 삶을 사셨는데 여러 종류의 못된 죄인들에게 분노와 심판의 손길을 펴시는 대신 “사랑과 섬김”의 따뜻한 손길을 펴시면서 사시는 정말로 이상하시고 정말로 놀라우신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다음 이틀 동안 무덤에 묻혀 계시다가 이틀 후인 주일 새벽에 부활하시고 부활하신지 40일 후에 하늘로 승천하시는 참으로 이상하시고 참으로 놀라우신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저주의 죽음을 당하는 일과 무덤에 묻히는 일과 무덤에서 살아나는 일과 하늘로 다시 올라가는 일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삶과는 너무너무 거리가 먼 정말 이상하시고 정말 놀라우신 일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심판과 저주에서 구원하실 구세주로 세상에 “초림”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다음 우리 죄인들을 영원한 하늘 집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다시 세상에 “재림”하실 성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볼 때 우리 죄인들은 성자 예수님의 망극하시고 영원하신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너무너무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흐리면서 쓸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놀라우신 성자 예수님의 삶의 모습”에 대한 말씀을 들으신 강변교회의 교역자들과 성도들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가득히 베풀어주셔서 우리들이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너무너무 이상하시고 놀라우신 성자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성자 예수님의 망극하시고 영원하신 사랑과 은혜에 감동을 받고 성자 예수님의 망극하시고 영원하신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해서 영원한 하늘 집으로 올라가시는 축복을 받으시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찬송가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162, 175) 1절과 2절을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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