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자들은 복음과 율법을 가까이 놓는 것을 불편해하며, 가능한 한 둘을 멀리 떼어놓는 것을 상책이라 생각한다. 모순돼 보이나, ‘복음’은 오히려 ‘율법’을 함의한다. 복음은 율법을 런칭(launching)한다.
‘복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함을 받는다’이다. 이 ‘복음’의 개념 안에 이미 ‘율법의 정죄’가 실현된 ‘죄인’이라는 단어가 함의됐다.
이 ‘율법의 정죄’를 받은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언약이 주어진다. 이것이 복음이다. 만약 ‘전자’가 없다면 ‘후자’도 무용하다.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정죄 받고 ‘그리스도’께로 가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그에게서 ‘복음’이 구현된다.
이처럼 ‘율법’과 ‘복음’은 불가분리이다. 다시 말하지만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될 때 잘못된 것이지, ‘죄인을 정죄하는 것’은 그것이 제대로 역할을 한 것이다. 율법의 정죄를 받지 못한 자는 구원의 필요성도 못 느끼고 나아가 구원자 그리스도께로 가지도 않는다.
‘죄인을 정죄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소위 ‘율법의 몽학선생(갈 3:24)’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복음과 율법을 분리시키는 것은 난센스이다.
◈복음 안에서의 죄의식 복음 밖에서의 죄의식
자연인(the natural)의 죄의식은 대개 그가 받은 도덕, 교양, 종교 교육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것들의 함양 정도에 따라 죄의식도 차이가 난다.
‘무욕을 탐하는 것도 욕심(To desire to be desireless is a desire in itself)’이라고 믿는 불교인들이나, 나쁜 소리를 듣거나 보거나 말하면 ‘귀씻이(洗耳)’ ‘눈씻이(洗目)’ ‘입씻이(洗口)’를 할 만큼 자기 수양을 중시하는 유교인들의 죄의식은 당연히 월등하다.
반면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던 훈족(흉노족. Huns, 4-6세기 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에 존재하던 유목민족)이나,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Geruman)은 짐승이라 불릴 만큼 잔인하고 야만스러웠다.
그러나 이런 ‘죄 의식’의 차이는 ‘자연적인(natural) 것’의 차이로, ‘초자연적(supernatural)’인 ‘복음 안에서의 죄의식’과는 무관하며, 그것의 여부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고 이끌지 못하고를 결정짓지 못한다.
예컨대 ‘자연적인 죄의식’에 민감하다고 그리스도께로 더 이끌림을 받는다거나 그것에 둔감하다고 그렇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자는 오히려 그를 율법주의 종교인(a legalistic believer)이나 도덕가(a moralist)로 만든다. 정죄의식에 민감했던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에로 빠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 ‘복음 안에서의 죄의식(guilt in gospel)’만이 그를 그리스도께로 이끈다.
이처럼, 죄의식에도 도덕, 교양, 종교로 함양된 ‘자연인의 죄의식’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복음 안의 죄의식’이 있으며, 이 중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은 후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그리스도께로 인도받은 후엔 이제껏 자기가 가졌던 죄의식이 ‘자연인의 허위의식(위선적 죄의식)’임을 깨닫고 그것의 불필요한 눌림에서 벗어난다.
예수님이 죄를 피하려고 온갖 결례의식들(purification ceremonies)을 엄수하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향해 ‘외식자(hypocrites, 마 23:25)’라고 한 것은 그것이 그들을 율법주의자로 만들어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을 막는 ‘자연인의 죄의식’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 ‘복음 안에서의 죄의식’은 예수님이 ‘성령 강림’후, 그의 제자들에게 전혀 다른 ‘죄,의, 심판’의 기준이 그들 가운데 생겨날 것을 말씀하신 것에서도 암시된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 16:8-10).”
그들이 이전엔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죄’만 알았는데, 이후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복음 안에서의 죄(guilt in gospel)’개념을 갖게 될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 임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히 10:28-29).”
‘의(義)’ 역시 그들이 이전엔 ‘율법적(행위적) 의(義)’를 최고의 ‘의’로 여겼는데, 성령으로 말미암은 ‘복음 안에서의 의(義)’개념을 가지므로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믿음의 의’가 참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죄(罪)의식’이 바뀌니 ‘의(義)의식’도 바뀌어, 그리스도를 안 믿는 것이 대죄(大罪)요 그리스도를 유일한 의(義)로(고전 1:30) 믿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분별력’ 역시 그 안에 ‘복음 안에 있는 죄의식’을 함의한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2-13).”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아(중생하여) 분별력이 생기면 사람 안에 ‘복음 안에서의 죄의식’이 새롭게 생겨난다는 말이다. 물론 성령 없는‘미중생자’자연인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복음 안에서의 죄의식(guilt in gospel)’은 결코 사람을 자포자기적인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리는 법이 없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롬 5:5)이 그를 붙들기 때문이다.
설사 그가 엄청난 대죄(大罪)를 저질러 통렬한 죄책감의 나날을 보낼지라도 아주 엎드러지지 않고(시 37:24) 다시 분발(奮發)한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 ‘성령으로 말미암은 복음의 소망’이 그를 일으켜 세우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 일부 청교도들이(Puritan, 淸敎徒) 복음과 유리된 ‘편향된 죄의식’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사람들을 정신병과 자살로 몰아넣었던 사적(史跡)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복음 안에서의 죄의식’은 반드시 소망으로 귀결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
세례 요한이 “하늘로서 오신 이는 하늘의 것을 말하고 땅에 속한 이는 땅에 속한 말을 한다(요 3:31)”고 했다. 이는 하늘로부터 오신 이는 ‘죄와 의에 대한 하늘의 가르침’ 곧, ‘복음 안에서의 죄와 의’를 가르치고, 땅에 속한 사람은 ‘땅에 속한 가르침’ 곧 ‘자연인의 죄와 의’를 가르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가르친 전부가 새로운 기준의 ‘죄(罪)와 의(義)의 가르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성령 강림’의 목적도 이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함이었다(요 16:8-10).
이 ‘죄와 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은 자가 그리스도와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자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