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본회퍼, 오해와 편견 (17) <조선구마사> 논란 (2)
중국 문화침탈 취약 이유, 사대와 굴종의 역사 때문
사회주의 성향 현 집권자들 ‘중국몽’ 동참으로 심화
중국 영향력 늘수록, 자기반성과 타자존중 잃은 채
절대선 여기는 원죄적 심성 침잠, 회개 필요성 상실
◈중국의 문화적 퇴락: 자기반성 기회를 박탈한 문화대혁명
전 세계에서 중국인들만큼 자국 문화의 유형적 측면에 대한 자만이 극에 달한 이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실상 허세로 가득한 이 자만심의 기원은 ‘주제 파악’의 기회가 완벽하게 결여된 중국 특유의 공산주의 역사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중국의 60-70대 노인 대부분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된 문화대혁명에 몸소 참여한 이들이다. 당시 10대 청소년기를 보냈던 이 세대는 홍위병 세뇌교육에 철저하게 물들어 인민재판을 주도했다. 인민재판은 ‘자아비판’을 통해 공산당에 반하는 생각이나 행적이 드러난 이들을 잔혹하게 처단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현장이었다.
당시 자아비판은 재판에 회부된 자가 자발적으로 공산당에 반대한 행적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가족이나 친구 등 주변인이 해당 인물을 고발하고, 고발된 이가 군중의 위협과 분노에 밀려 마지못해 자신의 과거 언행을 자백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다수가 인민재판에 회부된 경우 서로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같이 끌려온 가족이나 친구의 죄목을 더 크게 부풀려 고발하고 이를 각자 인정하는, 밑바닥까지 떨어진 인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영화 <패왕별희>(1993)에는 경극 배우 샤오러우(장풍의 분)와 그 의동생 뎨이(장국영 분)가 함께 인민재판에 회부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두 의형제는 서로를 비난하고 고소하며, 의형인 샤오러우는 자기가 살기 위해 그 자리에 와 있던 자신의 아내 쥐셴(공리 분)까지 배신한다.
이 장면은 문화대혁명 당시 인민재판의 처참한 상황을 충실하게 반영한다. <패왕별희>를 감독한 첸카이거는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으로 세뇌되어 활동한 인물로,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바를 바탕으로 이 장면을 재현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중국인들, 특히 인민재판을 주도했던 홍위병들의 마음 속에는 ‘자기반성=비참한 죽음 혹은 사회적 매장’이라는 도식이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는 그들의 삶의 지표가 되어 그들의 후손들, 즉 현재 중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류세대인 40대, 50대에게도 전수되었다.
결국 오늘날 중국 기성세대는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는 것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할 뿐더러, 타인이 자기 문제나 한계를 지적해도 절대로 수긍하지 않는 막무가내식 자기정당화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태도가 세계관으로 확장된 결과가 현재 중국의 일방적인 자민족중심주의 외교와 패권적 역사왜곡, 문화왜곡 행태이다.
여기서 더 심각한 점은 문화대혁명이 중국인들로부터 자기반성의 심성을 빼앗아갔을 뿐 아니라, 중국 문화가 가지고 있던 나름의 형이상학적이고 인간중심적이며 도덕적-윤리적인 사상전통 전반을 말살해 버린 점이다. 이로 인해 현재 중국에는 제대로 된 정신문화라고 할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오늘날 중국의 문화수준은 대개 그들의 옛 것을 피상적으로 우려먹든가, 서구와 여타 동아시아 국가들의 문화요소들을 베껴오든가, 아니면 마오쩌둥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온 공산주의 사고와 습성을 미화하고 포장하는 데 머물러 있다.
이처럼 중국문화가 정신적·무형적 영역에서 빈곤하기 그지없는 상태로 떨어지면서, 주변국에 대한 중국의 문화적 영향력 역시 급전직하하였다. 더 이상 주변국들이 중국의 것, 중국의 문물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중국의 수출산업이 크게 성장한 것은 가격 경쟁력 때문이지, 품질이나 브랜드 파워 때문이 아니다.
이렇게 중국문화의 흡인력과 영향력이 소멸되자, 자기반성을 할 줄 모르는 현재 중국의 주류 세대가 택한 대응법은 주변국 영토와 문화유산을 자기 것으로 강탈해 흡수하는 침략적 방편이다. 문화적으로 주변국에 베풀고 감화시킬 것이 없기에, 문화전쟁에서 뒤로 밀린 상태이기에, 유형적 요소를 강탈하여 그 손실을 메우려 하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적 영향: 반기독교적, 비윤리적 심성의 확산 우려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중국문화의 이런 유물론적이면서 자만심 가득한 성향은 그 문화적 영향력에 지배되어 살아온 중국인들의 온전한 인격 형성에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한다.
단지 기독교 신앙을 박해하고 적대시한다는 점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평등하고 윤리적인 인격 대 인격 관계를 배우고 실천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대한 문제를 야기한다.
본회퍼는 기독교인들의 복음 실천에서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논의한 바 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 행위가 사회라는 역사적 현실 안에서, 특히 교회 안에서 성도와 성도 간에 맺어지는 상호 초월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인간 인격은 그 인식적 한계 때문에 타자를 그 자체로서 대상화하거나 파악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는 자아에게 초월적이다. 따라서 인간이 타자를 지배하고 억압하고 동일화하는 모든 행위는 근원적으로 악하다. 이러한 판단이 본회퍼 윤리사상의 중추를 이룬다.
그러하기에 그는 기독교적 윤리 실천이 반드시 인간 실존의 주요 구성요소인 사회적 정황, 문화적 정황을 유념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본회퍼가 바라본 인류 전반의 사회적·문화적 정황의 본질은 원죄로 인한 타락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문화반성 시도는 항상 인간의 원죄적 본성을 애통한 심령으로 진지하게 되짚어 수긍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원죄란 인간이 함부로 침범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간 데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선악과의 계명을 거역한 그 죄성은 오늘날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관계를 파괴하는 월권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렇게 원죄 개념을 중심에 둔 본회퍼의 문화이해 관점으로 볼 때, 문화대혁명 이후의 중국 문화는 인간의 원죄적 죄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문화로 진단된다.
이런 비윤리적 문화풍토를 당연시하는 중국이 최근 외교적으로 고립된 것은 어찌보면 필연에 가깝다. 돌아보면 도광양회(韜光養晦)하면서 중국의 퇴락한 문화적 본성을 감춰온 덩샤오핑의 정치력이 진정 대단하게 여겨질 따름이다.
한국은 이런 중국의 문화침탈에 대단히 취약하다. 중국으로부터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았던 사실과 더불어 그렇게 중국의 문화적 지배력 아래 놓이는 것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겨온 사대와 굴종의 역사 때문이다.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로 자처해온 조선의 전근대적 문화풍조는 오늘날 ‘중국몽(中國夢)’에 동참하기를 꿈꾸는 한국의 사회주의 성향 집권자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최근 미디어를 통해 전방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중국 문화자본 침탈 문제는 단순히 우리 전통문화 품목 몇 가지를 빼앗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더 심각한 문제는 현재 중국 문화의 영향력이 우리 사회에 강해질수록, 우리는 자기반성의 지혜와 타자존중의 윤리를 잃어버린 채 자기가 절대선이라 여기는 원죄적 심성에 더 깊이 침잠해 들어갈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교회 내 기독교인들이 회개의 심령을 상실하는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한국사회 구성원 전반이 윤리적, 문화적 자기반성 기회를 상실하는 위험에 처하게 만들 것이다. 이는 교회와 사회 모두의 질적 성장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뒤로 후퇴시키기까지 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근 <조선구마사>를 비롯해 중국의 문화침탈 의도를 담은 여러 대중문화 콘텐츠가 지탄받고 외면받는 상황이 다행스럽기 그지없게 여겨진다. 이는 ‘중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거부한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중국의 문화적 영향력 속에 자리잡고 있는 반기독교적이고 비윤리적인 속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