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고 한 것은 단지 ‘실제 죄인(actual sinner)’을 부르러 왔다는 말이 아닌, ‘실제 죄인’이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죄인(admitted sinner)’을 부르러 왔다는 말이다.
만일 예수님이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죄인’까지 부르러 왔다면 그것은 모든 인류를 부르러 왔다는 말이 될 것이고, 따라서 인류는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구원받아야 한다. 이는 모든 인류는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두 질문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엔 두 가지 질문이 따른다. 먼저 ‘인간 안에 죄인 됨을 각성하는 능력(awakening ability)이 있다는 말인가?’이다. 연장선상에서 주어지는 두 번째 질문이 ‘인간이 자기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펼쳐질 수 없다는 말인가?’이다.
대답은 둘 다 ‘노(no)’이다.‘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교리에서 보듯, 죄로 죽은 모든 인류는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기에 ‘자신의 죄인 됨’을 자각하는 사람을 구원에로 부른다면 단 한사람도 구원받지 못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죄인 됨’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구원에로의 부르심’이 좌절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는 앞서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죄인(admitted sinner)’을 부르러 왔다는 명제와 모순된다.
그러나 이 모순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지만 하나님께는 쉽다(마 19:24-26)’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의 능력’에 의해 극복된다.
곧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과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둘 다 ‘그의 구원에의 부르심(calling to salvation, 召命)’의 능력에 의해 성취되게 한다는 말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하나님의 구원에의 부르심’이 죽은 영혼을 일깨워 그것에 반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죽어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 했을 때 죽은 나사로가 그 말을 듣고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게 한 것(요 11:44)”과 같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는 말씀대로, 전능자의 ‘구원에의 부르심’이 죽은 자의 귀에 들리게 하여 그에게로 나아오게 한다.
이는 창조 시 하나님이 들을 귀가 없는 ‘무 존재(impresence)’를 향해 ‘있으라(Let there be, 창 1:3)’고 말씀하시니 그대로 생겨났던 것과 같은 이치다. ‘무 존재(impresence)’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존재(being)’하게 됐듯, 강력하고 유효한 ‘구원에의 부르심’은 죄로 죽어 ‘들을 귀 없는 죄인’에게 들려 그에게로 나오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죄인만 부르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로 죽어 자신의 죄인 됨을 모르는 죄인으로 하여금 그것을 알게 하여 그에게 나오게 하신다’는 뜻이다. 이는 강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경륜’이 ‘피소명자(被召命者)’의 무능, 거부 등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지가 정복당함
‘구원에의 부르심’에 반응하려면, 사람의 귀가 열리는 것만으론 안 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의 ‘반역적인 의지(rebellious will)’가 정복돼야만 그것에 응할 수 있다.
물론 귀가 열려 ‘자기의 죄인 됨’을 알면 자연히 그리스도께로 나온다(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런 점에서 ‘죄인 됨의 자각’과 ‘그리스도께로 나아옴’은 별개가 아니다. 성경이 ‘무지’와 ‘완고함’을 병용(倂用)하거나 상호 인과관계(因果關係)에 두는 이유도 여기 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여기선 구태여 둘을 구분해 후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고 했을 때, 그가 “갈 바를 모른 채 떠났던 것(히 11:8)”은 그의 의지가 하나님께 정복된 결과이다.
예수님이 배에서 그물을 깁는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은 것(마 4:21-22)”이나,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좇은 것(마 9:9)”은 모두 ‘그의 부르심’에 의지가 정복된 결과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죄인의 정복당함’을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고후 10:5)”이라 표현했다.
‘믿음’을 선물이라 함도(엡 2:8) 인간 임의로 그것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께 의지가 정복된 자만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거듭남’ 역시 ‘그리스도께 복종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의 출생’을 의미한다. 새 영을 받아 거듭난 자 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 찌라(겔 36:26-27).”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이유
‘죄인 됨의 자각’과 ‘그리스도께로 나아감’만이 하나님 역사(working, 役事)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 반대의 ‘죄인 됨에 대한 무지’와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않음’ 역시 그러하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무지’와 ‘불신앙’을 하나님의 경륜 탓으로 돌렸다.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2:40).”
물론 이 말씀을 오해해선 안 된다. 본래 그들은 ‘눈이 밝고 마음이 부드러웠는데 하나님이 어느 순간 그들의 눈을 감기고 마음을 완고하게 했다’는 말이 아니다. ‘유기(abandonment, 遺棄)’의 교리가 의미하는 바 ‘뭔가의 추가(something added)’가 아닌, 본래의 ‘무지’와 ‘완고함’을 ‘내버려 둠(롬 1:24, 28)’이다.
만일 ‘눈의 감김’과 ‘마음의 완고’가 ‘추가적인 어떤 것(something added)’이라면, 본래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뜻이며, 그러면 여기서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교리가 부정된다.
이는 ‘어떤 것이 추가(something added)’인 ‘구원에의 부름’에 대한 예시 구절들과 대비시키면 그 의미가 더욱 뚜렷해진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하나님이 불택자들에게는 ‘어두워지고 완고해진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는(abandonment, 遺棄)’ 소극적인 경륜(passive economics)을, 택자들에게는 ‘어두워진 눈을 여시고 완고해진 마음을 제하여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적극적인 경륜(active economics)을 행하신다.
그리고 그 ‘적극적인 경륜’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가 자리한다(눅 24:30-31).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