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속 가상칠언… 그리고 부활 이후 주님의 ‘해변 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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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목사 설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을 기리며

▲김명혁 목사. ⓒ크투 DB

▲김명혁 목사. ⓒ크투 DB

본문: 요한복음 21:1-22
장소: 양성교회(2021.4.11)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배신자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에게 하신 일곱 마디 말씀을 한 마디 한 마디 우리 마음 속에 새겨 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 일곱 마디 말씀을 ‘해변 칠언’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성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감동과 은혜와 축복이 됩니다. 이 일곱 마디 말씀들은 우리들의 식어버린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사명을 깨우쳐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불 붙게 해주시는 감동과 은혜와 축복의 말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성자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형편과 처지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실패와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 21:3) 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본래 성자 예수님께 대한 열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지만 고난 당하고 죽는 것이 두려워서 성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씩이나 부인하는 엄청난 실수를 범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베드로의 3번 배신의 진술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예수를)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마 26:70).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 26:72).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마 26:74).

사도 베드로는 그 일로 인해서 통곡하면서 뉘우치기는 했지만, 다시금 성자 예수님을 등지고 디베랴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세 번씩이나 만나는 놀라운 체험을 했지만, 주님을 다시 등지고 옛 날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런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 21:3).

베드로는 극심한 좌절과 허탈감에 빠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보이스 박사는 사도 베드로의 처지를 두 가지로 해석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자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과 자기 힘으로 전도사역을 하려다 실패하여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고 해석했고, 자기 생각과 자기 힘으로 고기를 잡으려다 실패하고 말았다고 해석했습니다.

우리도 성자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과 방법대로 사역을 하다 실패와 좌절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일하고 고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는데, 신학 지식과 인간적인 방법으로 일하다 실패와 좌절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극심한 박해의 상황에 처할 때, 신앙 양심을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사업으로 돌아가서 사업을 하려고 하다가 실패와 좌절에 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실패와 좌절에 빠진 배신자 베드로와 제자들을 포기하시고 내 버리시지 않으시고 저들에게 다시 또 다시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요 21:1).

사실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일곱 번째로 나타나신 일이었고 사도 베드로에게는 네 번째로 나타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역자들에게 또 다시 나타나시고 또 다시 나타나시는 분이십니다.

세겜에 내려가서 살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또 다시 나타나셔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 임하셔서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배신자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시고 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너무너무 고마우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성자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배신자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에게 하신 일곱 마디 말씀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성자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5절)”라는 동정심이 가득한 부드러운 말씀이었습니다. 심한 책망이나 훈계를 하시는 대신 동정심이 가득한 부드러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얘들아”, 이 말은 엄마나 아빠가 아이들에게 하는 부드러운 말입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 말씀은 “너희에게 지금 아무것도 없지?” 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지금 고기도 없고,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고, 소망도 없고, 평안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 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실패도 아시고 우리들의 좌절도 아십니다. 우리들의 특심한 열심도 아시고 자만과 고집도 아시고 지친 것과 탈진한 것도 아시고 궁핍도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동정심이 가득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지금 너에게 고기가 있느냐?” “아무개 목사야, 아무개 전도사야 지금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한 배신자 베드로와 제자들의 대답은 솔직하고 간단했습니다. 동정심이 가득한 부드러운 성자 예수님의 물으심에 대해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깊은 감동을 받으면서 “없나이다, 없나이다. 아무것도 없나이다”라고 자기들의 실패와 공허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회개의 고백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솔직하고 진실하게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꾸미며 위선을 떨기도 합니다. “뭐 별로 좌절 하지도 않고, 별로 허탈 하지도 않고, 뭐 괜찮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성자 예수님 앞에 거짓과 위선을 떨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정말 다행히 베드로와 제자들은 솔직한 회개의 고백을 했습니다. “없나이다(아무것도 없나이다)”.

2.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성자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6절)”는 말씀이었습니다. 고기잡이 방법과 삶과 사역의 방법을 새로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기잡이에 있어서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성자 예수님의 지시를 따라 고기잡이와 전도 사역을 하여야 할 것을 이미 3년 전에 배운 일이 있었습니다. “깊은” 데로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많이 잡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전도할 때에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돈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을 이미 3년 전에 배운 일이 있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지금 다시금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고기잡이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삶의 방법과 사역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임스 보이스 박사가 해석한 대로 주님께서는 다시금 복음 전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오른 편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왼 편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3년 전에는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라고 지시했습니다.

성자 예수님의 지시를 때에 따라서 그대로 따르면 된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아무것도 의지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만 의지하고 특히 성자 예수님께서 분부하시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제 성자 예수님의 분부와 지시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의 분부와 지시에 따라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 고기가 많이 잡혀서 그물을 들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다시금 성자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게 되었고 성자 예수님의 권위 앞에 다시금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서 “주님이시라” 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3. 와서 조반을 먹으라

성자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하신 말씀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12절)”는 말씀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실패와 좌절과 피곤함과 배고픔에 쌓여 있던 제자들에게 따끈따끈하게 구운 떡과 생선을 가져다가 주시면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친히 떡과 생선을 가져다가 먹여 주셨습니다.

사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본래부터 제자들을 먹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음식을 먹여 주셨을 뿐 아니라 마지막에는 자기의 살과 피까지 먹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53, 54, 56절에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 라는 말씀을 3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고기잡이를 크게 하는 것도 중요하고 목회 사역과 선교 사역을 크게 하는 것도 귀중 하지만 성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서 먹고 마시는 것이 더욱 더 귀중합니다.

성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먹어야 하고 성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서 먹고 마셔야 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와서 나를 먹으라.”

4.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성자 예수님께서 네 번째로 하신 말씀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성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성자 예수님께서 가장 하시고 싶으셨던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연인들이 서로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자기 나 사랑해?” “자기 나 사랑해?”

성자 예수님께서 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와 여러분들을 연인처럼 보시면서 우리들의 사랑의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시는지 우리들은 잘 모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기 때문이고,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결국 성자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을 듣고 싶어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사도 베드로의 가슴에 성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다시금 불타게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하셨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실 사랑보다 더 귀중하고 더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과 우주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또는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우리들은 성자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는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우리 이름과 우리들의 사역과 우리의 명예를 더 사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께 대한 순수하던 처음 사랑이 금이 가고 식어지게 됩니다.

성자 예수님께 대한 사도 베드로의 사랑도 금이 가고 있었고 깨어져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을 배신했기 때문이고 성자 예수님을 등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방법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또는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성자 예수님의 간절한 사랑의 호소에 사도 베드로의 깨어진 사랑이 싸매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가슴은 성자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불붙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떨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 물으실 때 사용하신 “사랑하느냐”라는 단어가 “아가파스”라는 절대적인 사랑이란 단어였는데, 사도 베드로가 대답할 때 사용한 단어는 “필로”라는 상대적인 사랑이란 단어였습니다. “아가파스 메”, 즉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은 “네가 100%로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필로 쎄”, 즉 “나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60% 정도의 필로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두초 디부오닌세냐, ‘사도 베드로와 안드레의 부르심(1308-1311)’,

▲두초 디부오닌세냐, ‘사도 베드로와 안드레의 부르심(1308-1311)’,

이전과 달랐습니다. 이전과 같은 충동적인 자신만만한 사랑의 고백이 아니라 솔직하고 겸손한 사랑의 고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아가파스 메” “네가 나를 100%로 사랑하느냐?” 사도 베드로는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필로 쎄”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인 60%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필로 쎄.”

성자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물으셨는데, 이번에는 베드로의 처지에 내려 오셔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그러면 네가 나를 60%로 사랑하느냐 필레이스 메”.

베드로의 형편을 전적으로 이해하시는 차원에서 물으신 너무너무 고마우신 질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떨리는 마음으로 뉘우치는 눈물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주여,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허물 많은 베드로인 것을, 내가 최고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60%의 사랑인 필로의 사랑임을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필로 쎄.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의 눈물 어린 진솔하고 겸손한 사랑의 고백을 아주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너무너무 진솔하고 겸손한 사랑의 고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5.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성자 예수님께서 다섯 번째로 하신 말씀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절)”는 말씀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성자 예수님의 어린 양을 먹이는 것으로 나타내라는 분부였다고 생각합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라고 세 번 분부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양무리들을 존귀히 여기며(시 16:3), 그들을 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지으신 양이고 성자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려 피 값으로 사신 양이기 때문에 “내 양”이라고 부르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고 육신의 음식으로 먹이고 사랑으로 먹이고 주님의 살과 피와 생명으로 먹여야 합니다.

성자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것이 곧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자 예수님께서 양들을 너무 귀중하게 여기시고 너무 즐거워하시고 너무 사랑하시고 너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어린 양”은 나이 어린 어린이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지극히 작은 자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크고 힘있는 어른 양들만 먹이지 말고 지극히 작고 힘없는 “어린 양”을 먹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이들과 지극히 작은 자들을 먹이고 치라는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 양들을 먹이면서 한 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나중에 “하나님의 양무리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치라(벧전 5:2)”는 분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미국 유학 생활 후반기부터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을 먹이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외국 학생들을 주말에 제가 유숙하던 아주 작은 집으로 데려와서 먹이는 일을 할 때 재미가 있었습니다.

언젠 가부터 대접을 받는 일보다 남을 대접하는 일을 힘쓰게 되었습니다. 독일에 있는 어느 집사님 부부를 식당에 가서 제가 대접했더니 그분들이 두고 두고 그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선교사들이나 제자들을 만나면 전에는 50불이나 100불, IMF 이후에는 10불이나 20불을 주곤 했습니다.

저는 집사님들이나 장로님들도 때때로 식당에서 대접을 하곤 했는데 아주 좋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먹을 것이나 스티커와 같은 조그만 선물을 주곤 하는데 너무나 좋아합니다. 북한 사람들을 먹이는 일에도 힘을 쓰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구룡마을에서 사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빵과 용돈을 조금씩 나누어 주곤 하는데 너무 좋습니다.

6.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성자 예수님께서 여섯 번째로 하신 말씀은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19절)”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미래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 마음대로 왕래하고 활동했지만 앞으로는 어떤 분에게 붙잡혀서 움직이고 활동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십자가와 고난을 피해 다녔지만 앞으로는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죽음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죽음의 고난을 영광과 연결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 자신이 걸으신 그 길을 사도 베드로가 따라오게 될 것이라는 영광스러운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에게 하신 특별한 말씀이었습니다. 아무나 받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들이 받을 수 있는 특별한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에게 특별한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지만 순교의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특별한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7. 나를 따르라

성자 예수님께서 일곱 번째로 하신 말씀은 “나를 따르라(19, 22절)”는 말씀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맨 처음으로 되돌아온 느낌입니다.

우리는 처음 믿을 때도 주님을 따라야 하고, 주님을 위해 일을 많이 하고 난 다음에도 역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만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을 바라보고(시선을 집중, 히 12:1,2), 주님을 생각하고(생각을 집중, 히 3:1),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닮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천국 문에 이를 때까지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생각하고 주님만을 섬기고 주님만을 따르고 주님만을 순복하고 주님만을 닮아야 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두 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요 21:19).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2).

배신자 베드로가 성자 예수님의 해변 칠언의 말씀을 들은 다음 회개의 길을 걷게 되었고, 새롭게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소명이 다시 회복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소명이 다시 불 붙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항복하며 순종하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성자 예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회복했습니다. 양무리에 대한 섬김의 사랑을 회복했습니다. 새로운 사명감을 가지고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로마에 가서 순교하는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순교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너무 귀중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에게 주신 회복의 은혜와 재헌신의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기록자: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한 말씀 더 합니다. 이와 같은 귀중한 ‘해변 칠언’의 말씀을 상세하게 서술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요한복음 21장 20, 24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는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요 21:20, 24)”.

박윤선 목사님은 그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을 했습니다. “여기 ‘이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는 물론 위에 관설된 바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20절)’이다. 그러면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누구였을까? 그는 그 때 디베랴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갔던 일곱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세베데의 아들일 것이다. 그는 물론 사도 요한이다.”

사도 요한은 성자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너무너무 귀중한 제자였는데, 성자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의 일들까지 너무너무 상세하게 서술해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너무너무 귀중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요한보다 하나님 사랑과 예수님 사랑에 미친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에 관한 말씀들을 아주 길게 서술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요한1서 4:7-21).

여기 15절 가운데 “사랑” 이란 말씀을 30번 사용했습니다. 사도 요한보다 하나님 사랑과 예수님 사랑에 미친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마지막 소원과 기도는 성자 예수님을 간절히 사랑하고 기다리면서 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1) 라는 기원이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도 사랑을 강조하기는 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13).

설교를 마무리하며

오늘 이것으로 “해변 칠언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씀을 기리며”라는 제목의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해변 칠언의 말씀은 순수하고 올바른 신앙을 버리고 세속화와 배신의 길로 갈 수도 있는 우리에게 경종이 되는 아주 귀중한 말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세속화의 길로 갈 수도 있고 배신의 길로 걸어갈 수도 있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우리를 찾아오셔서, 회개하고 믿음과 사랑과 순종과 헌신의 길로 걸어갈 수 있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신 우리들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의 손길을 펴셔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와 믿음과 사랑과 순종과 헌신의 길로 걸어갈 수 있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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