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공적이고 저주스럽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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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모든 사건들은 ‘구약의 예언 성취’이다. 그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탄생하신 것도(마 1:1), 동정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도(마 1:20) 다 예언의 성취이다. 특히 여기서 말하려는 ‘그의 죽으심(고전 15:3)’도 그러하다.

그가 죽으신 방법도(벧전 2:24) 목적도(롬 5:8-10) 예언대로 됐고, 죽음의 시기에 있어서도 그렇다. 복음서에 ‘때가 이르지 못했다’는 말씀들이 여럿 나오는데, 그것도 성경 예언과의 일치를 두고 한 말이다.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음이러라(요 3;3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 이러라(8:20).”

◈공적이고 합법적인 죽음

성경에는 예수님이 살해당할 기회가 왔을 때 적극적으로 그것을 피한 내용들이 나온다(요 5:13-18; 11:53-54).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동네 낭떠러지로 끌고 가 밀쳐 내리려고 했을 때이다(눅 4:28-30).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눅 4:28-30).”

이를 보며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했는데, 정작 죽을 기회가 왔을 때 왜 그것을 피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순간적인 죽음의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그의 죽음’은 인류 택자의 구원을 위한 ‘세계사적’이고 ‘예언적’인 것이기에 합법적인 심판을 받아 공적(公的)으로 죽으셔야 했기 때문이다. 곧 총독 빌라도로부터 십자가형을 선고받고(요 19:16) 수많은 목격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돼야 했다.

2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의 ‘십자가 죽음’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수납되는 것은 이런 그의 ‘공적인 처형’ 덕분이다.

예수님에게 집행된 ‘형(刑)’은 두 가지였다. 육체적 사형(死刑)인 ‘십자가형’과 영(靈)적 사형(死刑)인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려짐(마 27:46)’이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피를 다 쏟고 운명 직전 ‘내가 목마르다(요 19:28)’ 하시고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친 것은 그것의 공적인 선포였다.

그리고 운명 직전 “다 이루었다(요 19:30)”며 ‘율법의 성취’를 공적으로 선포하셨고, 이를 근간으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며 자신을 못 박은 원수들의 사죄를 구했다.

그것은 단순히 성경 저자의 관점에서 쓴 문학적 비사(figures of speech, 比辭)가 아닌, 실제로 그의 십자가 죽음이 갖다 준 결과물을 공표하신 것이었다. 곧 “이제 나의 죽음으로 율법이 완성됐으니, 아버지여 그것을 보시고 저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라는 의미였다.

◈저주스러운 죽음

죽음에도 저주스런 죽음이 있고 평안한 죽음이 있다(왕하 22:20, 렘 34:4-5).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역사상 가장 저주스러운 것이었다.

동서고금에 교수형(絞首刑), 참수형(斬首刑), 화형(火刑), 능지처참형(凌遲處斬形) 등 다양한 사형 형태가 있어 왔으나, 고통에 있어 십자가형에 비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죽이지 않고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도록 하는 ‘고문형태’의 사형이다. 못박힌 고통 외에 작렬하는 태양 아래 목마름과 출혈로 인한 갈증, 허기와 추위로 인한 고통의 가중으로 죄수들은 고통에 지쳐 죽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 같은 고통의 시간을 6시간이나 견뎌내다 운명하셨다. 그의 죽음이 그렇게 저주스러워야 했던 것은, 하나님을 대적한 인간의 죄 혹은 억조창생(億兆蒼生) 택자의 죄의 무게가 그 만큼 무거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택자로 하여금 죄의 구속을 입어 아브라함의 ‘의의 복’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갈 3:13-14).”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33)”는 말씀도 예수님이 나무에 달리는 저주스런 죽음을 죽어야 택자의 구주가 되실 것을 말한 것이다.

마귀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리지 못하도록(마 16:22) 혹은 다른 형태의 죽음을 죽도록 집요한 방해를 한 이유도 알 만하다.

그의 ‘저주스러운 죽음’엔 ‘십자가의 죽음’ 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는(마 27:46) ‘영적 죽음’도 포함됐다. 그것은 말 그대로 ‘지옥의 고통’으로, 인간의 상상을 불허하는 인간 경험 너머의 일이다. 다음의 그의 단말마적(death agony, 斷末魔的)인 외침은 그것의 저주스러움을 잘 보여준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그의 버려짐이 우리로 영혼의 목자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했다(벧전 2:25).

◈완전한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점 없고 흠 없는 어린양 같은 보배로운 피(벧전 1:19)”는 율법의 요구(롬 6:23)를 성취하는 ‘완전한 죽음’이며, 그 자체로 ‘구원의 필요충분조건(必要充分條件)’이다. 그러나 ‘그의 완전한 죽음’이 ‘그의 죽음의 태도(Jesus’attitude towerd his death)의 완전함’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완전한 죽음’과 더불어, ‘그의 죽음의 태도’에 있어서도 완전했다는 말이다. 후자를 결정짓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의 의미와 목적’을 알고 그것을 ‘자의로 선택’함으로서, ‘그의 죽음의 모습’을 완전케 했다. 따라서 그것들을 불가능하게 하는 ‘아기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이 피하게 하신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 헤롯 왕(Herod)이 그를 죽이려 하자, 하나님이 그의 부모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 아기 예수를 애굽으로(마 2:13) 피신시키고,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Archelaus)가 정권을 잡았을 땐 나사렛으로 피신시킨 것은(마 2:22) 이 때문이었다.

둘째, ‘자원하는 죽음’이라야 그것이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순종’을 넘어 자원하는(willings) ‘기꺼운 것(joyful submission)’이었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7-8).”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셋째, 잡말(雜言)이나 불평이 없는 죽음이라야 ‘완전한 모습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고통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으심으로 ‘그의 죽음의 모습’을 완전케 하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사 53:7, 9).”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택자를 향한 사랑의 발로였기에(갈 2:20) ‘완전한 모습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는 말씀처럼, 누가 아무리 살신성인(殺身成仁)했어도 그것에 사랑이 결여됐다면 ‘완전한 모습의 죽음’일 수 없다.

예수님이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기도한 것 역시 ‘그의 죽음의 완전한 모습’을 그려낸다.

‘그리스도의 피의 완전한 공효’와 더불어, 완벽한 ‘그의 죽음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엡 5:2)’이 되게 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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