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코로나 백신접종 후진국 대한민국 (1)
현 정부, 정책 기획부터 과도한 이상 앞세운다
그 이상에 현실 맞추려 무리한 법령 제정·시행
기대한 정책 효과 없거나 심각한 실패 직면해
정책 실패 감추려 실패한 정책 지속 추진하고,
폐해 과대 포장과 거짓말로 모면하는 일 반복
사회주의적 백신 정책에 고통받는 교회, 국민
◈현 정권의 백신정책: 백신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있는 대한민국
코로나 백신 문제로 나라 전체가 어수선하다. 우리 정부가 현재까지 확보했다고 발표한 백신 물량은 집단 면역을 달성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올 상반기까지 904만명분의 백신이 공급 확정되었다고 발표된 바 있지만, 이 가운데 상당수가 선구매 물량이라 향후 국가간 백신 확보 경쟁 상황에 따라서 실제 도입분은 더 줄어들 가능성도 상존한다.
게다가 현재까지 국내에 실제로 반입되고 접종된 백신 대부분이 유럽에서 심각한 안전성 논란을 일으킨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이다.
정부가 안전성 면에서 보다 우수한 것으로 알려진 화이자 백신 2,000만명분을 추가계약했고 이 물량이 올해 하반기를 시작으로 국내에 들어올 것이라고 4월 25일부로 발표하기도 했지만, 해당 계약이 어느 정도의 효력을 갖는지 공개된 바가 없어 실제 국내에 인도될 백신 물량에 대해서는 정권 수뇌부와 당국자들 외에는 누구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화이자 및 모더나 백신은 전 세계적으로 물량 확보 경쟁이 벌어지고 있어, 정부가 발표한 계약이라는 것도 향후 세계 각국 상황에 따라 무산되거나 실제 백신 국내 반입이 한없이 연기될 가능성도 있다.
현재까지 정부가 발표한 내용들은 모두 백신 계약 수량만 앞세울 뿐, 실제 국내에 들어올 물량이 얼마가 되리라고 제대로 알려준 적이 없다. 따라서 국민들 입장에서는 백신 확보와 관련된 정부의 발표를 신뢰하기 어렵다.
이렇듯 한국의 백신 확보 상황이 매우 불투명하고, 실제 접종 건수에서도 크게 뒤쳐진 와중에 영미권 선진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국들은 집단 면역 달성을 위해 백신 접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세계 주요국 중 한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백신 확보와 접종이 늦어졌던 일본 또한 최근 미일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돌파구를 찾아나가는 모습이다.
순식간에 백신 후진국이 되어버린 상황에 크게 실망한 국민들은 정부의 백신 확보노력 부족과 저가 백신을 우선시하는 기조를 질타하고 있다.
이에 정권에 대한 신뢰와 지지율은 급전직하 중이고, 다급한 정부는 며칠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스트라제네카나 얀센 백신보다 더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중국과 러시아 백신 도입마저 고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향후 화이자, 모더나 백신의 실제 국내 반입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만, 화이자 백신 추가계약에 대한 발표 역시 조삼모사 식의 면피용 발표에 불과하다면, 현재 정부 입장에서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하지만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는 중국과 러시아 백신이 대량으로 국내에 들어올 가능성 역시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백신 도입과 관련된 현 정부의 심각한 실책은 단순히 정치적, 행정적 아마추어리즘으로만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번 백신 도입 과정에서 정부가 보여준 정책 실행 방식은 그간 문재인 정부가 일관되게 고수해온 정책 성향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정책 성향은 우선 정책기획 단계에서 과도한 이상을 앞세운다. 그리고 그 이상에 현실을 맞추려 무리한 법령을 제정하고 시행하다가, 기대한 정책효과를 거두지 못하거나 심각한 정책 실패에 직면하고 있다.
그리고는 정책 실패를 감추기 위해 실패한 정책을 지속 추진하면서, 그 폐해를 과대 포장과 거짓말로 모면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 일자리 정책, 부동산 정책, 인권보호 정책, 친중친북 외교정책 등 모든 면에서 현실을 간과한 채 무리수를 두고 있고, 이러한 모습은 코로나 방역과 백신 도입 정책에서도 일관되게 확인된다.
코로나 방역과 백신 도입에 있어서 정부가 내세운 이상은 K-방역, 즉 정권 수뇌부와 집권 여당이 배타적 통제권을 행사하는 철저한 관제방역이었다.
우리 정부의 방역지침이 세계 최고라는 무근거한 확신을 바탕으로 민간의 관여를 배제한 채 관 주도로 아날로그적 방역 노력에 열중했고, 그것이 마스크 사용에 거리낌이 없는 동아시아의 문화적 배경과 맞물려 코로나 확산 초기에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다.
그리고 이 효과에 자신감을 얻은 현 정권 수뇌부는 자신들의 정책이 우수하다는 것을 선전하기 바빠, 후속조치를 취하는 데 전혀 힘을 들이지 않았다.
한국과 비교해볼 때, 작년 서구 선진국 다수가 초반 코로나 방역에 실패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는 서구 각국이 심각한 방역 실패를 경험한 뒤 즉시 민간 주도로, 아날로그적인 소극적 방역이 아니라 첨단 바이오 기술을 활용한 적극적 방역에 역량을 집중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리 정부는 오로지 문재인 대통령의 지도를 받는 정부만이 코로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태도로 일관했고, 백신 등에 의존하지 않고 관제방역의 성과만 내세우려 했으며, 해외나 민간의 코로나 대처 역량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한국은 이제 완전한 백신 후진국으로 전락했으며, 부스터 샷과 매년 백신 접종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앞으로 부작용이 적은 코로나 백신을 구할 수는 있을 것인지, 그리고 집단 면역 달성에 몇 년의 시간이 더 걸릴지 예견조차 할 수 없는 불안하고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다.
◈사회주의 정권들의 역사: 무리한 이상 추구, 강압과 거짓으로 귀결
왜 현 정권은 이러한 정책 실패에 직면하게 된 것인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는 단순히 코로나 백신 정책 하나에만 국한된 실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현 정권의 전체 정책성향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라 볼 수 있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포진되어 있는 대한민국 집권 세력은 사회주의 정치 체제를 지향한다.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지닌 의미의 광범위함과 모호성 때문에 논란이 야기될 수 있으므로 간략하게나마 정리하자면, 사회주의는 크게 두 개 지류로 분류될 수 있다.
하나는 민주적 평등사회 실현을 위해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타협하면서 그 강력한 생산력을 활용하는 서유럽형 수정주의 사회민주주의 지류, 다른 하나는 혁명 전위로서 공산당 일당에 모든 권력과 생산수단을 몰아주는 스탈린주의적 공산당 독재 지류이다.
원래 마르크스 공산주의 사상의 최종 지향점은 분권적·민주적 평등사회이다. 마르크스가 1850년 3월 처음으로 자신의 글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표현을 썼을 때, 그는 어떠한 형태의 일인 독재 혹은 공산당 독재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이 표현을 사용했을 때 라틴어 ‘dictatura(독재)’라는 용어를 유념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대 로마의 특수한 정치 제도를 지칭한다.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황제정으로 넘어가기 전, 공화정 시절의 로마에는 오늘날의 의회(특히 상원의회) 역할을 담당하는 원로원이 존재했다.
귀족과 평민들 가운데 사회 저명인사나 유력자들로 구성된 원로원은 평시에는 토론과 표결을 통한 민주적 방식으로 운영되었지만, 대규모 전쟁이나 역병 등 로마 전체의 운명을 위협하는 위기 상황에서는 한시적으로(6개월에서 1년) 기존에 세워진 법안과 원로원 의원들의 표결 권한을 넘어서는 권한을 가진 독재관을 임명해 그의 지도를 따랐다.
이 제도는 카이사르에 의해 악용되어 종신독재관 제도로 변질되고, 결국 황제정으로 넘어가는 통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독재’라는 말을 쓸 때 생각하는 제왕적 일인독재 체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독재 권한은 한시적으로 부여되었고, 심각한 위기상황을 앞두고서만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권력욕이 관여될 틈새가 크지 않았다.
서구 역사에 정통했던 마르크스는 이 용어 속에 담긴 ‘한시성과 초법성’의 의미에 집중했다. 위기 상황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한시적으로 기존의 법령을 넘어설 수 있는 권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에게 위기 상황이란 공산주의 혁명 과정에서 야기되는 부르주아 계급의 극렬한 반동적 저항이었다. 이 저항을 억누르고 프롤레타리아 대중 전체에게 권력과 생산수단을 돌려주기 위해서는 한시적인 초법적 권력 행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독재적 권력 행사가 그 목적을 달성한 즉시, 이 독재는 다수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지배를 위해 극복되고 사라져야 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생각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의미였다.
궁극적으로 모든 노동자들이 평등한 분권적 민주사회를 이루는 혁명, 이것이 마르크스의 궁극적 이상이었다. 그의 이상은 계몽주의 사상가답게 과하게 이상적이고 낙관적이었다.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해 정권을 획득한 소련의 레닌은 마르크스의 이상을 유지하고자 혁명 전위인 공산당 일당 독재를 정당화하되, 되도록 당내 집단 지도체제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언젠가는 공산당 일당에 집중되어 있는 권력과 생산수단을 일반 노동자와 농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닌의 후임인 스탈린은 절대 권력에 강박적인 집착을 보였다. 그는 공산당 내부의 파벌 투쟁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1929년 소련 공산당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공산주의 정책과 개인적 권위에 반하는 이들 모두를 잔혹하게 처단하는 대숙청(1936-1938)을 통해, 마르크스가 가르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과는 전혀 무관한, 제정 러시아 당시 차르의 제왕적 전제정을 연상시키는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마르크스의 이상 실현이 좌절되자, 그 상실감과 환멸, 역풍을 차단하기 위해 공포와 억압의 독재 체제를 현실적 대안으로 삼았던 스탈린의 통치방식은 마오쩌둥과 김일성을 비롯한 전 세계 공산주의 독재자들이 따라야 할 모범적 지침으로 여겨졌다.
문재인 정권의 정책수행 방식을 살펴보면, 유럽형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기존에 한국에 고착된 정치경제 체계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인 까닭에 사회주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없는 한계가 있고, 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유럽형 사회민주주의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하려는 모양새를 보인다.
그러나 일부 핵심 정책과 관련해서는 정권 수뇌부가 품은 사회주의 이상을 독단적으로 국민들에게 강요하는 행태가 보이고, 이 경우 여지없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심각한 정책실패가 드러나며, 이로 인해 거짓된 정책평가로 일관하는 스탈린주의 독재 성향을 드러낸다. 이 경우 정책실패에 의한 피해와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 전체에게 돌아간다.
최대한 안전하게, 그리고 최대한 신속하게 코로나 백신을 접종시키는 일이 현재로서 손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임은 국민 모두가 알고 있다. 백신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무한경쟁 국면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정권이 만전을 기하는 자세로, 자만과 이상에 안주하지 않고 현실을 돌아봤다면 적어도 현재와 같이 형편없는 백신 접종 상황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고, 바로 이 때문에 국민들이 정권에 큰 실망감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백신 정책의 성공은 한국교회의 예배와 모임 정상화를 위해서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과업이다. 이 중대한 과업이 현 정권의 사회주의적 백신정책으로 인해 꽤 장기간 달성되지 못하게 된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당의 지령에만 따르면 만사가 형통하리라’는 비현실적 이상에 몰두하는 독단적인 정치 행태 때문에, 우리는 향후 몇 년을 더 집합금지 명령에만 의존해야 할지 모를 상황에 처해 있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