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죽음을 ‘세 가지’로 구분지어 말한다. 영적 죽음(spiritual death),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이다. 이 셋은 하나 하나의 ‘독자적인 의미’와 함께, 또 ‘상호 연관성’속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특히 후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지 못하며, 나아가 ‘죽음’의 상대적 개념인 ‘생명’도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했을 때, 그 ‘죽음’의 의미는 그 모든 의미들을 두루 함의했다.
◈영적인 죽음
성경이 사람을 ‘죽었다 살았다’고 말할 때, 다는 아니지만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을 의미한 경우가 많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5).”
예수님께서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고 하신 말씀에서도, ‘죽음’ 역시 ‘육체의 죽음’ 이상의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그러나 영적인 소경인 유대인들은 그것을 ‘육체의 죽음’에 한정지었다.
이는 이어진 그들의 대구(對句)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요 8:52).”
이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롬 5:10, 엡 2:12)’과 그로 인한 ‘하나님 무지(엡 4:18 살후 1:8)’를 의미한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창 3:6)’ 후 그가 분명 죽었음에도 그의 육체가 여전히 살아있었던 것은(물론 그 후 얼마간 살다가 죽었기에 죽음은 영육(靈肉)을 다 함의한다), 죽음이 단지 ‘생물학적인 소멸’ 이상의 ‘관계의 단절’임을 보여준다.
이는 비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도 동일하게 경험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슬픈 것은 그의 ‘육체의 소멸’ 때문만은 아니다. 그로 인해 다신 볼 수 없는 ‘관계의 단절’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죄로 인한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이 최종적이거나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 죄인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여기서 ‘구원’을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성자’를 ‘화목 제물’로 표현한 것은 ‘죽음’의 의미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임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피할 수 없는 첫째 사망
범죄한 인간에게 있어 육체의 죽음은 응당(應當)한 결과이며, 아무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의 적용은 신·불신자(信不信者)의 구분이 없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아담의 원죄를 타고난 모든 인류에게 ‘육체의 죽음’은 보편적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성경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같은 믿음의 사람들의 죽음을 “열조에게로 돌아갔다(창 25:8; 35:29; 49:33)”고 표현한 것은, 그들도 그의 조상들처럼 예외 없이 ‘죽음의 길’로 갔다는 말이다. (물론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서 승천한 에녹(히 11:5)이나 엘리야(왕하 2:11) 같은 예외적인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육체의 죽음’은 ‘하나님이 정한 이치(히 9:27)’이기에, 아무리 인간이 그것을 피하려 노력을 하고 의술을 발달시킨다 해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그것을 피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 ‘육체의 죽음’이 ‘죄의 심판(the judgment of sin)’의 성격을 갖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죄의 결과(the result of sin)’라고 함이 더 적절하다. 이는 그것이 그에게 ‘최종적인 심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신·불신자(信不信者)에 따라 그것이 ‘영생의 축복(the bless of eternal life)’, ‘영원한 저주(the eternal curse)’에의 관문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을 복되다(계 14:13)’고 한 것은 그것이 그들을 ‘영생의 축복’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하기 위해 반드시 요단강을 건너야 했듯, 믿는 성도에게 죽음은 천국 입성을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성도의 육체 죽음’을 ‘금세에서 천국으로 넘어가는 문지방이다’라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해설서 저자인 토마스 빈센트(Thomas Vincent, 1634-1678) 역시 ‘육체의 죽음’을 ‘죄의 결과’요 ‘영광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정의했다.
“사망은 모든 사람에게 형벌로 임하는가?”라는 질문에 “사망은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죄의 결과로써 임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찌르는 것이 못된다. 그것은 비참에서 벗어나 영광으로 들어가는 입구다”라고 했다.
◈피할 수 있는 둘째 사망
심판을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 계 20:14)’으로 명명한 것은 모든 죄인에게 정해진 ‘육체의 죽음(히 9:27)’ 이후에 따라오는 죽음이라는 뜻에서다. 그리고 그것은 ‘앞의 죽음’과는 달리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영원한 죽음(살후 1:9)’혹은 ‘영벌(마 25:46)’이라고도 한다.
이는 율법으로부터 요구받는 ‘영원한 성자의 죽음(히 13:30)’, 곧 ‘영원치(value of eternity, 永遠値)의 죄삯’이 지불되지 않은 자에게 가해지는 형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형벌’이지만 앞의 경우들처럼 하나님이 사전에 피할 길을 열어주셨다. 곧 성자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속물로 내어주어(마 20:28) 우리로 하여금 ‘죄삯 사망’을 지불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죽음’을 취하면 하나님께 ‘죄삯’을 지불한 것으로 인정받아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의 해를 받느냐 안받느냐는 죄인이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하는 선택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9).” 오늘날 우리의 ‘믿음’도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죄삯 사망’을 갚아주신 대속주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도 ‘그의 죽음을 내 죄삯으로 받아들여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는 말씀도 그 뜻이다.
‘둘째 사망’의 ‘죄목(罪目)’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미 언급했듯, 그리스도의 죽음을 취하지 않아 율법이 그에게 부과한 ‘죄삯 사망(롬 6:23)’을 지불하지 못한 죄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죄삯’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대속물’로 드려진 그리스도의 죽음을 취하지 않아, ‘그의 피를 부정하게 만들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죄(히 10:29)’이다.
사도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자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자들(갈 2:21)’이라고 비난한 것은 같은 죄를 지적한 것이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취하는 자들은 그의 죽음을 존귀하게 하는 자들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