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그리스도인을 향해 ‘그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됐다(고후 5:17)’고 선언한다. 이전에 그는 ‘아담에게 속한 죄인’이었는데, 이젠 ‘그리스도께 속한 의인’이 됐고, 이전에 ‘땅의 사람’이었는데 이젠 ‘하늘의 사람’이 됐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신으로 하여금 ‘옛 사람의 환영(幻影)’에 사로잡히도록 해선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 안에 실존하는 ‘죄의 세력’이 있음도 간과해선 안 된다. 비록 그것이 자신을 지옥으로 끌고 가진 못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소소(小小)한 파괴력을 행사한다.
이는 마귀가 십자가에서 궤멸되어(창 3:15) 더 이상 그리스도인에게 ‘궁극적인 파괴력’은 갖지 못하나 그의 잔존력(殘存力)을 성도들에게 행사하는 것과 같다.
과거 영적 결벽증(spiritual mysophobia)을 가진 일부 청교도들처럼 조금만 뭘 잘못해도 지옥에 갈까 벌벌 떠는 것도 문제지만, ‘율법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은 어떤 짓을 해도 정죄 받지 않는다’는 ‘죄의 낙관론’에 붙들려 ‘죄의 경각심(the alarm of sin)’을 무너뜨리는 것도 문제이다.
그로 인한 죄의 노출(infection of sin)은 그에게 ‘양심의 약화(weakness of conscience, 고전 8:7)’를 불러와 ‘구원의 확신’을 잠식한다(‘구원의 확신의 약화’를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율법주의’를 연상하나, ‘죄로 인한 양심의 약화’도 같은 결과를 낳는다).
아니면 역(逆)으로 죄를 범해 놓고, “‘이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고 내 속에 거하는 죄니(롬 8:17)’ 그건 내 책임 영역 밖이야. 바울 선생님이 그랬어(성경 본문은 그런 의미가 아님)”라며, 죄에 대한 무모한 담력을 갖는다.
이미 언급했듯,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설사 잘못을 해도 그것 때문에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으며, 그의 신분이 다시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죄의 남용’을 정당화 시켜주는 명분 역시 성경 어디에도 없다.
이즈음, ‘그리스도인의 갈등하는 두 자아(conflict of two egos)’, ‘그리스도인의 의인 됨과 죄인 됨’의 의미를 함의한 루터의 ‘simul iustus et peccator(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을 떠 올리게 된다.
◈바울과 루터의 두 자아
루터의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이중적 자아(two egos)’ 개념은, 희랍 신화에 등장하는 상체는 인간이고 가슴 아래부터는 말(馬)인 ‘반인반수(therianthrope, 半人半獸)’의 켄타우로스(Centaurus) 같은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의인 50%, 죄인 50%’라는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100% 완전한 의인’인 동시에 ‘100% 완전한 죄인’이다. 그가 범죄하는 것도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가 아닌,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범죄는 그가 ‘구원받지 못한 증거’ 혹은 ‘그의 구원의 미완성의 증거’일 수 없으며, 그의 죄가 결코 그의 ‘칭의와 구원’을 훼손하거나 무효화하지도 않는다.
동시에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죄 된 의인(the guilty righteous man)’이기에 죄 짓는 것은 당연하다”는 ‘죄의 낙관주의’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완전한 의인’과 ‘완전한 죄인’ 사이에 끼인, ‘갈등하는 존재(a conflicting existence)’임을 설파한 것이다.
다음의 사도 바울의 고백 역시 같은 맥락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18-19, 21)”.
인간의 이러한 ‘갈등 구조’를 ‘불완전한 칭의(구원)’의 증거로 삼으려는 이들이 있다. 갈등이 종식된 거의 성자(聖者)급인 소수의 종교 엘리트들에게만 ‘완전한 칭의(구원)’가 구현되고, 갈등 구조 속에 있는 자의 ‘칭의(구원)’는 불완전한 것으로 규정하며 ‘영적 계급주의(hierarchism)’를 조장한다.
이러한 ‘영적 계급주의’는 일견 ‘칭의(구원)’을 높이려는 의도처럼 보인다. 곧 ‘모든 그리스도인의 칭의(구원)’를 완전한 것으로 규정하면, ‘갈등 구조’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칭의(구원)’이 저평가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들에게 ‘저런 저급한 사람들도 칭의(구원)를 받았다고? 칭의가 그렇게 쉬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인간의 행위’에 의해 ‘칭의’가 결정되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절대적인 것이 아닌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죄의 경각심은 구원받은 자의 것
그리스도인의 ‘죄의 경각심(the alarm of sin)’ 역시 그가 불완전한 구원을 받은 ‘불완전한 의인(the imperfect righteous man)’으로서가 아닌, 완전한 구원을 받은 ‘완전한 의인(the perfect righteous man)’으로서 갖는 자각이다.
역설적이게도 ‘죄’는 ‘죄인’이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 발견한다. 거듭나 영혼 속에 빛이 들어온 ‘의인’이라야, 비로소 자신의 누추한 실상을 보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면한 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한 그의 죄의식은 자신이 남들보다 특별히 더 불의해서가 아니다. 그의 의로움이 자기의 죄를 더욱 자각케 한 때문이다.
반면 죄인의 눈엔 ‘자신의 죄’가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이 ‘눈 떤 당달 소경’이라고 했던 바리새인들이 그들이다(요 9:41). 죄가 그들을 소경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의 눈은 착시(錯視) 현상을 일으켜 ‘자기 죄(罪)’가 아닌 ‘자기 의(義)’를 보았고, 그 착시된 시력(視力)으로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 찾아냈다.
그리스도인의 ‘죄인 됨의 자각’은 결코 그의 ‘의인 됨의 붕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인 됨의 견고함’에서 나온 것이다. 사도 바울의 절절한 죄의식 역시 같은 맥락이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만약 그에게 ‘의인 됨의 자각’이 없었다면 그런 갈등도 없었다.
구원받은 자의 ‘죄의 경각심(the alarm of sin)’은 율법주의자의 ‘죄에 대한 병적 공포심(morbid fear of sinning, hamartophobia)’과는 전혀 다르다.
전자가 ‘구원을 확보한’ 이긴 자의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면, 후자는 ‘불확실한 구원확보’를 위한‘공격기제(attack mechanism)’이다.
그리스도인의 ‘죄와의 싸움’은 승리를 담보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싸움(the battle of uncertainty)’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쟁취한 승리를(골 2:14-15) 기반으로 한, ‘보장된 싸움(the guaranteed battle)’이다.
전자의 심연엔 ‘구원 획득의 불확실성에서 나온 무저갱(bottomless pit)적 공포심’이 자리한다면, 후자의 심연엔 ‘구원 획득자로서의 든든함’이 자리한다.
‘그리스도인의 두 자아의 갈등 구조’를 ‘불완전한 구원’의 증거 혹은 ‘죄를 정당화하는 빌미’로 삼고, ‘구원받은 자의 죄의 경각심’과 ‘구원 탈락에 대한 두려움’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교회사에서 ‘너무 쉽게 너무 자주’일어났던 오류였던 것 같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