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승의 러브레터] 여러분의 친구 관계는 안녕하십니까?
1. 친구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친구 따라 강남 가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좋은 곳이면 모르겠으나, 그냥 따라가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놀랍게도 유교 문화에서는 스승과 제자 관계를 ‘붕우’, 즉 친구 관계라고 했습니다. 진짜 친구는 같은 나이대, 같은 취미의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짜 친구는 좋은 길을 함께 걸어가도록 도와주고 함께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친구는 나이 차이를 초월합니다. 다윗이나 요나단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2. 요즘 일어나는 문제들을 보면 참 끔찍하면서 친구들의 관계로 일어난 일이어서인지 더욱 안타깝습니다.
한강에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의대생은 아직 그 이유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은 친구와 함께 술 마시는 자리였습니다. 실족사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사건이 됐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마지막 자리를 함께한 친구 역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존재합니다.
3. 더 충격적인 사건이 지난 주 있었습니다.
20대 중반, 한참 꿈이 피어오를 나이인 여성 A는 동창생인 친구 B에 의해 2,145회의 성매매 뒤 결국 생을 마감했습니다.
불과 1년 사이 벌어진 일입니다. 외국에서 일어난 일인 줄 알았습니다. 내용을 보면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중·고교와 대학교 동창 B가 매우 교묘히 꼬신겁니다. 생을 마감한 A는 철저히 B를 친구를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설마 이 친구가 나에게 안 좋은 걸 권할 리 없을 거라고 말이지요.
4. 20년 이상 형사 생활을 한 경찰관도 처음 겪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친구 B는 A의 어머니에게도 인정받는 착한 친구 행세를 했습니다. 어머니마저 B를 의심하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성매매를 권했을 리 없습니다. 대개는 매우 착하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매우 집요하며 매우 오랜 기간 동안 표적으로 삼고 접근합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집단으로 접근합니다.
B는 자신이 사귀는 남자까지 동원했습니다. A는 의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설마 남자도 아닌 여자, 그래도 동기인 친구가 나를 이용할까 하고 말이지요.
5. 결국 첫 번째 성매매를 하게 된 계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돈이 필요하게 만들었을 것이 뻔합니다.
끊임없이 유혹했을 겁니다. 돈이 필요하니까 일단 한 번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꼬드겼을 것이 분명하지요. 그리고 그 한 번이 안타까운 일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거절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관계로 말이지요. 아니, 어쩌면 그 전에 관계를 끊어내지 못한 것이 억울할 지경입니다.
6. 어떻게 이런 상태가 되도록 있을 수 있었느냐고 사람들이 묻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생각보다 이런 식의 접근에 대처하기 힘듭니다.
먼저 친해지고 나서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고, 처음에는 아주 작은 부탁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루에 서너 번, 많게는 열 번 이상 성매매를 강요당한 A에게 B는 악마의 날을 드러냈습니다.
이사하면 따라가고, 우연한 방법으로 계속 만남을 시도하고, 협박하며 회유하고 집착했습니다.
7. 이쯤 해서, 우리는 우리의 친구관계를 점검해야 합니다. 아니 나는 좋은 친구인지를 봐야 합니다.
만날 때마다 유흥으로 유도하고 점점 집착하게 만드는 누군가는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다니엘서를 읽으며, 우리에게 좋은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또 내가 좋은 친구가 되어줘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친구는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친구로 살고 있습니까?
8. 세상에 물들게 하는 친구를 조심해야 합니다.
반대로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 먼저 선을 그어야 합니다. 다니엘 1장에서 느부갓네살 왕의 사람이 된 다니엘은 그럼에도 자기의 생활을 바벨론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름이 바벨론식 이름으로 바뀐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의 삶을 지켜내는 일이 중요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먹지 않겠다고 먼저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답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선언해야 편합니다. 마음으로만 생각하면, 세상이 먼저 권합니다.
9. 착한 척 하면서, 오히려 세상 문화로 계속 물들이고 있는 관계로부터 ‘Run’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척 하면서 오히려 세상의 이야기로 삶을 물들이고 있는 친구에게서부터 ‘Run!’ 하세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잖아” 하면서도, 삶은 유흥과 환락, 놀이로만 시간을 보내게 만든다면, 거기서 얼른 ‘Run’ 하세요.
왜냐하면 이런 사람과 가까워질수록, 순간의 재미에 중독되면서 믿음의 이야기를 나눌 친구로부터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2장에서 목숨을 잃을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고민을 믿음의 친구들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 후 다니엘은 왕 앞에서 더이상 숨기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합니다. 예수를 전합니다.
10. 이 일 이후 다니엘은 지혜자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바벨론의 최고 지도자급의 반열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다니엘서 2장 48-49절이 이렇게 끝납니다.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그를 세워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을 삼았으며 왕이 또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
성경에서 이러한 대목을 유의해서 봐야 합니다. “왕궁에 있었더라”.
다니엘은 왕궁에 남고, 자신은 온 지방을 다스리는 반면 세 친구는 지방 관리자로 보낸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친구들에게 좋은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믿음의 친구들과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그 순간 모든 권한이 주어지자마자 한 것이 “나는 왕궁에 남겠으니, 세 친구들은 지방에 가라”고 한 것입니다.
다니엘이라는 선지자의 이름에 취하지 말고, 우리 수준의 영성에 맞추어 보면 이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다니엘에게는 뭔가 모르게 “나는 혼자 힘으로 할 수 있어”라는 교만이 싹트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매우 큰 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니엘 3장에서 다니엘의 이야기는 사라졌으니까요.
11. 가끔 정말 믿음의 친구들이 좋지만, 내 삶에 간섭하는 건 싫을 때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그랬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는 듣기에 좋지만, 제 삶에 자꾸 간섭하면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멀리서 보는 게 좋습니다.
요즘이 특히 그런 시대입니다. 유튜브에서 보고 TV에서 보기는 좋지만, 그들의 삶을 살아내는 건 버겁다고들 말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과 가까워질 기회를 잃어갑니다.
12. 다니엘의 위기는 3장에서 느부갓네살 왕이 우상을 만들고 절하라고 함에도 한 마디 말하지 못하는 존재로, 아니 그 장에서 사라짐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위기는 세상의 위력앞에, 이름만 있을 뿐 능력이 사라짐에 있습니다. 왕은 급기야 자신이 만든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지겠다고 합니다. 모두가 다 절했지만, 절하지 않는 세 사람이 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어떤 자들이 와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만 그렇게 절하지 않는다고 고발한 겁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대상에 다니엘은 빠져 있습니다. 물론 다니엘이 너무나 높은 곳에 있어 고발을 당하지 않을 위치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세 친구들이 고발당할 때 아니 우상에게 절하라고 할 때 한 마디 말할 위치에 있는 지혜자의 우두머리였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13. 적어도 우리 수준 아니 제 수준에서 가늠해 본다면, 다니엘은 이미 세상 문화에 길들여지고, “이 정도는 뭘”이라며 마치 그것이 바벨론의 멋인 양 해석하고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같이 하는 자들이 바벨론의 화려한 사람들이요. 바벨론의 아름다운 문화였으니, 어찌 다니엘이라 해도 영향이 없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세 친구들이 붙잡혀 옵니다. 왕이 세 친구들에게 우상에게 절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 친구들이 말합니다. 총 세 가지 이야기입니다.
첫째, 일일히 당신과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즉 매달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세상에 매달리지 않아야 세상을 이끌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 하나님은 풀무불에 던져져도 구해주실 분이시다. 믿는다는 겁니다. 나는 어떤 상황에 놓여도 하나님이 구원해주실 것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믿음의 고백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셋째,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이 풀무불에서 구원하건 안 하건 전혀 상관없이, 나는 우상에게는 절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실거야”라는 믿음의 추상성은, 내 삶에서 타협하지 않을 부분이 확고함으로, 그리고 구체성으로 이어졌습니다.
14. 그리고 그들은 풀무불 속에 던져지고, 바로 그 풀무불 안에 하나님 아들의 형상을 느부갓네살 왕이 봅니다.
다시 말하면 세 친구가 불에 타지 않음이 신기한 것이 아니라, 그 불 속에서 세 친구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내 바람’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고통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향한 약속을 지키고자 할 때,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비로소 우리가 그들과 다름을, 아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함은 언제나 화려한 곳만을 원하고, 내 바람이 성취되기만을 바라며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우리의 선택 때문입니다.
15. 여러분, 바로 그 현장에 다니엘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가 비로소 세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부갓네살 왕의 변화를 보면서 자신의 약속들이 떠오르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먹는 것 하나도 하나님께 약속했는데, 철저히 삶의 규칙들을 지키기로 했는데, 왕 앞에서도 이끌려 다니지 않았는데….
“나는 이 화려하고 멋있는 바벨론의 사람들이 친구가 아니라, 저 믿음의 친구들이 내 진짜 친구들인데, 나는 왜 여기 왕궁에 남아 있었던가. 나는 왜 여기서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이끌려다니며 살고 있는가?” 그러지 않았을까요? 비로소 다니엘이 4장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16. 사랑하는 여러분,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친구를 잘못 두면 이미 관계가 형성된 그 우정이라는 빌미 하에, 사랑이라는 빌미 하에 여러분을 죽음의 지경까지 이르게 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아니, 그 관계는 하나님으로부터 여러분을 야금야금 떼어놓고 결국 완전히 갈라놓게 할 뿐 아니라 힘들 때마다 함께했던 믿음의 관계들을 무너뜨릴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중요한 사실은 여기 나온 세 친구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어찌 보면 서운하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이 조언해 주고 늘 함께 믿음의 삶을 살아가던 다니엘이 왕 앞에서 한순간 높임받았다고 자신만 왕궁에 남고, 심지어 우상에게 절하는 상황에서도 한 마디 말 못하는 세상 사람처럼 되어버린 모습.
친구들의 고통에도 말 한 마디 못하는 모습 앞에 한탄스러움이 없었을까요? 그는 다니엘에게 가르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한 마디도 친구 다니엘에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말로 가르침 대신 그들은 삶으로 살아냈습니다.
누군가에게 훈계하기 전, 그들은 풀무불에 직접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들만이! 그곳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코로나19가 많은 사람들의 관계를 망가뜨림을 봅니다. 특정인들과 밀착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여러분의 친구 관계는 안녕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주고받는 왕궁에서의 편안함, 바벨론의 화려하고 재미있는 문화가 어느덧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면서 믿음의 친구들이 없다고 한탄하고 있다면, 다니엘 3장의 왕궁에서 취해 버려 사라진 다니엘이 된 것은 아닌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혹 여러분은 남의 잘못은 탓하면서, 이 시대를 비판만 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그런 저와 여러분을 위해 하나님은 다니엘서 3장, 직접 자기 몸으로 풀무불에 들어가면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를 외친 세 친구들이 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런 이들과 하나님은 함께하시는 분이시요. 이들의 삶을 통해 어떤 세상의 왕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임을 잊지 마십시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