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사랑
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롬 9:11), 아니 우리의 형질이 이루기 전부터 시작됐다(시 139:16). 더 근원적으로는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엡 1:3)’이다.
이 하나님의 ‘창세 전 예정 경륜’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 엄마가 장차 태어날 아기를 ‘마음’에 품었다가, 잉태 후 열 달 동안 ‘뱃속’에 품어 해산에 이르는 과정에 비견된다.
이에 비해 아기가 엄마의 존재와 그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은 그가 태어난지 한참 후이다. 우리 역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신 바 된 속에서 계속적인 그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왔지만, 그의 사랑을 알게 된 것은 거듭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이다.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 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라는 찬송 가사 그대로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 전’에 시작됐다는 말은 다만 ‘그것의 기점(starting point, 起點)’이 ‘영원’이라는 것만이 아니다. 이후 ‘영원까지 이어지는 것’까지를 아우른다. 명실공히 ‘영원에서 영원까지’이다.
‘영원 전’에 시작되고 ‘역사 속 어느 시점’에서 중단됐다면, 그것은 ‘영원’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이 누굴 사랑했다가 그것을 중단했다면, 그것은 영원한 사랑이 아니다. 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엔 결코 중단이 없다.
다음 구절은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노래한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겔 37:26)”.
그리고 그 ‘하나님 사랑의 영원성(eternity of God's love)’은 그의 ‘영원한 의(the everlasting righteousness)’에 기반한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엡 1:3).” 이는 그의 사랑이 창세 전 ‘그리스도의 의(義)’ 안에서 됐다는 말이다.
우리의 숱한 약점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중단되거나 무효화 되지 않음은(롬 11:2),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가 그것을 받쳐주기 때문이다.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7)”.
스바 여왕(queen of sheba)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말하며, 그것의 기반으로 꼽은 솔로몬왕은 ‘의의 왕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리스도의 의(義)’가 택자에 대한 ‘영원불변의 사랑’을 보장한다는 뜻이다. “당신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려고 당신을 세워 저희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대하 9:8)”.
이렇게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영원하기에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소망’ 역시 ‘영원성’을 담지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 26:4)”,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131:3)”.
그리고 감히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삼하 7:29)”라고 간청할 수 있게 된다.
◈콩깍지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기쁘신 뜻’에 의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거기엔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객관성이나 합리성이 결여돼 있어, 제 삼자의 눈엔 ‘제 눈에 안경(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으로 비쳐진다.
이런 하나님의 ‘콩깍지 사랑’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중 대표적으로 소환되는 것이 ‘술람미(shulamite) 여인에 대한 솔로몬(Solomon)왕의 사랑’이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아 1:5)”.
자신은 ‘게달의 장막(the tents of Kedar, 볼품없는 염소가죽으로 된 양치기의 임시 거소)’같으나 그의 연인 솔로몬 왕에겐 그의 왕궁의 ‘침실 휘장(the curtains of Solomon)’같다는 말이다.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콩깍지 사랑’을 빗댄 것이다.
남성적인 매력이 흠씬 풍기는 ‘에서’를 마다하고 탐욕적이고 야비한 ‘야곱’을 사랑하고(롬 9:13), 수많은 강대국들이 있었음에도 ‘마이너(a minor)’인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도 하나님의 ‘콩깍지 사랑’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 7:7-8)”.
‘지혜 있고 강한 것들을 제쳐 놓고 미련하고 약하고 멸시받는 것들을 선택하신 것(고전 1:27-28)’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의 눈에서 ‘콩깍지’가 벗겨졌다면 우리 같은 ‘을(the second, 乙)’은 택함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했다(엡 1:4, predestined us…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his will)’고 한 것은 ‘우리가 구원택정을 받은 것은 순전히 그의 눈의 콩깍지(lovers are fools)때문이다’는 뜻이다.
◈후회 없는 사랑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후, ‘잘못된 결정이었어. 물려야 겠다’라고 하실 일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 만일 하나님의 부르심에 후회가 있다면 나 같은 이는 골백번 퇴짜다.
그의 부르심에 후회가 없음은 무엇보다, 그의 전지성(omniscient) 때문이다. 전능하신 이에겐 일찍이 감춰졌다가 뒤늦게 발각되는 일 같은 것은 없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에겐 처음부터 ‘모든 것의 시종(始終)’이 적나라하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6)”,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잠 15:11)”.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아셨다(롬 8:29)”는 말 역시, 단지 우리에 대한 ‘구원 예정(predetermination)’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의 DNA’와 ‘나의 장단점’을 비롯해 ‘내 존재의 모든 것’을 다 아셨다는 말이다. 아니, 하나님이 내게서 그것들을 그렇게 미리 정하셨다 함이 더 정확하다.
따라서 하나님껜 뒤늦게 드러난 나의 진면목에 화들짝 하여 날 내치실 일 같은 것은 없다. 야곱의 허물, 다윗의 중죄, 베드로의 배교가 드러났을 때도 하나님은 그러셨다. 그들이 돌이켰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용납하셨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롬 11:2)”는 “자기 백성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껜 그들을 버려야 할 만큼의 ‘예기치 못한 그들의 죄들(unexpected Sin)’을 조우할 일은 없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발락(Balak)의 요구에 발람(Balaam) 선지자가 그것의 불가능을 말한 것은 ‘취소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민 23:19-21)”.
우리의 ‘약점’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거둬들일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그 사랑이 ‘우리의 약점을 짊어지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완전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imperfect love)’과 대비되는 ‘완전한 사랑(perfect love)이다. 하나님은 그 ‘완전한 사랑’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요 13:1).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완전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기게 하신다. 종말에 임할 심판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고(요일 4:10), 미래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염려를 거둬들이게 하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은 다만 ‘문학적 레토릭(literary rhetoric)’이 아니다. 어떤 장애물들이 있어도 ‘택자에 대한 그의 사랑(구원)’을 구현시키는 강력한 동인(動因)이다. 그리고 그것의 기저(基底)엔 그의 ‘강력한 의지력’이 자리한다.
흔히 ‘진정한 사랑’은 ‘지·정·의(知情義)’를 겸비한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감정과 의지’만 있고 지식이 결여된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blind love)’으로, ‘감정과 지성’만 있고 의지가 결여된 사랑은 ‘에로티시즘(eroticism)’으로, ‘의지와 지성’만 있고 감정이 결여된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로 흐르기 쉽다.
‘하나님의 사랑’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것을 구현하는 최후의 견인차(wrecker, 牽引車) 역할을 하는 것이 그의 ‘강력한 의지’이다. 사랑하는 대상의 실망스러움이나 그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다양한 장애물들을 그것으로 극복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에 있어 이 ‘의지적 요소’를 간과 하고선 그것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감정’이나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흔들리는 우리의 사랑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의 이해에 이르지 못한다.
아내 고멜(Gomer)의 거듭되는 음행에도 그녀에 대한 사랑을 단념하지 않는 호세아(Hosea)는(호 1:1-9) 그의 백성에 대한 요지부동(搖之不動)의 하나님 사랑을 예표한다.
그리고 그의 ‘완전한 사랑’은 우리를 완전케 한데서 그 절정을 이룬다.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아 5:2)”.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아 6:9)”.
이 ‘완전함’은 그들의 ‘생득적인 완전함’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그의 구속으로 그들에게 자신과 동질의 ‘거룩함과 영광’을 입힌 결과이다(엡 5:26-27). 그리고 이 ‘완전함’이 그들의 ‘구원의 완전’을 보장한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그 대상을 불완전한 채로 방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불확실성’에 떨어지도록 허락지 않으셨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완전’을 지향하는 그의 이 ‘완전한 사랑’때문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