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휴머니즘에 이어, 17세기에 서구에서는 계몽사상이 나타나 18세기에 지배적이 되었다. 계몽사상가들은 당대의 종교적 신념들에 대해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제1차 산업혁명과 농업 개선 및 의학의 발달에 힘입어 인간의 삶의 질의 향상되고 고통이 줄어들고,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고, 뉴턴의 물리학과 기계론적 우주관 등 인간 지성이 발달함에 따른 것이었다. 계몽(the Enlightenment)은 이성 또는 “빛”으로 설명되었다. 계몽주의 사상의 목표는 지식, 자유, 그리고 행복이었고, 계몽의 내용은 개인주의. 진보와 과학에 대한 믿음, 자유와 평등, 진보, 관용, 온정, 헌법의 정부, 국가와 종교의 분리, 그리고 최종적으로 무신론(회의론) 등이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의 발전에 한껏 자만심을 가졌고 개혁이라는 빛나는 “희망”에 불탔다.
계몽주의자들은 성에 대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17세기 이후 인간 자유에 대한 계몽된 이론들이나, 특히 경험과 표현의 자유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섹스에 대해서도 논쟁도 나타났다. 성에 대한 토론은 흔히 당시 성장하던 도시의 상류층 남자들과 고급 매춘부들의 살롱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엘리트들 사이에 이성적인지만 세속적인 성윤리가 나타났다. 즉 욕망은 도덕적으로 용인할만한 것으로 그리고 쓸모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성적 추구가 엘리트들의 특권(privilege)처럼 되었다. 계몽주의 작가들은 전통적 기독교 성윤리에 반하는 노골적인 성을 묘사한 책을 씀으로 최소한 섹스에 대한 기독교적 죄의식을 공공연하게 무시하기 시작하였다. 종교개혁과 엄격한 경건주의적 성 윤리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성문화는 개방적이 되고 문란해져 갔다. 프리섹스를 향한 발걸음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여전히 기독교적 성윤리에 순응하고 있었다. 변화가 있었다 면 그것은 아직은 프로테스탄트 또는 개혁된 카톨릭의 맥락을 따르되, 계몽적 합리성에 맞추어 재조직하는 수준이었다. 가족과 사회는 여전히 가부장적이었고, 여성은 억압받았다. 계몽주의자들 마저도 여자의 공간은 가정 내에 있다고 굳게 믿었다. 휴머니즘이나 계몽은 남자들만의 일이었다.
성적 쾌락에 대한 출판물이 선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7세기 후반에 출판된 『Aristotle's Masterpiece』은 임신하지 않고 성을 즐기는 매뉴얼로서 18세기까지 인기를 누렸다. 이 책에는 음탕한 장면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어 당시의 성적 열망을 보여준다. 그 책에 등장하는 침대에서의 동등성에 대한 이야기는 상류여성의 영역인 로코코 풍의 침실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것이었다. 프리섹스의 이미지는 당시 돈 환(돈 지오반니), 카사노바, 시라노 드 벨주락 같은 난봉꾼 내지 연애꾼 이야기로 나타나고 있었다. 18세기 전반부에 본격적 포르노 서적도 나타났다. 1749년 출판된 『Fanny Hill: Memoirs of a Woman of Pleasure』라는 제목의 매춘부에 대한 포르노 소설에는 이성애, 동성애, 매질(사도마조히즘) 등이 표현되고 있었다.
산업혁명에 따라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매춘이 성행하였다. 직업으로서 매춘은 두 형태로 진화하였다. 즉 거리의 매춘부(prostitute. 길거리와 매음굴(brothel)의 매춘부)와 고급 매춘부(courtesan. 개인 살롱에서 선택된 부자 손님만 받는) 였다.
동성애는 여전히 죄악시되고 발견되면 처벌되고 주변부로 내쫒겼다. 그러나 성적 자유론자들 중에 동성애 경험을 표현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동성애자들은 다. 극장에서 배우들이 이성복장으로 출연하는 연극이 상연되기도 하였다. 생계를 위해 남성 역할을 하는 여성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철학자들은 성 범죄(소도미)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몬테스큐는 성범죄에 대해 처벌보다 그 예방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 모든 변화는 18세기 사랑과 욕망에 개방된 정신과 태도, 즉 Enlightenment erotica를 반영한다.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Augusto Del Noce (1910–1989)의 지적대로, 현대 성해방의 시작은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였다. 도덕을 적용함에 있어, 사생활에 대한 강조를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세상은 이미 변화하고 있었다.
민성길 한국성과학연구협회 회장(연세의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