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화목시킴으로
일견 ‘화목’과 ‘구원’은 무관해 보이나, 이 둘은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죄’로 하나님과 ‘원수’ 되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인간이,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결과가 ‘구원’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 화목, 구원’을 긴밀히 연결지었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9-10).”
사도 요한 역시 ‘구원’을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성자’를 ‘화목제물’로 표현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구원의 책’인 성경이 ‘화목’을 ‘구원’만큼이나 많이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한글로 번역된 ‘화목, 화평, 평화’라는 단어만 100회 이상 나온다). 성경이 ‘화평의 복음(행 10:36)’을 ‘구원의 복음(엡 1:13)’과 동일시하고, ‘구원 전파자’를 ‘화목케 하는 자(고후 5:18-19)’와 동일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 52:7).”
‘화목’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린 결과’이고, ‘심판’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결과’이다. 그리고 그 진노를 풀어드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다. 하나님은 그의 피에서 우리의 ‘죄 삯 사망(롬 6:23)’을 받아내심으로 우리와 화목, 구원하셨다(롬 5:10).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 시키는 것은 그것이 ‘죄 삯 사망’을 지불하여 ‘율법의 의’를 이루기 때문이다. 다음은 ‘의(righteousness)’와 ‘화목(reconciliation)’의 공존을 가르치는 구절들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 85:10)”,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7)”,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죄에서 해방시킴으로
‘죄에서 해방됐다(liberation from sin)’는 말은 ‘다신 죄를 안 범하게 됐다(죄의 영향력에서의 해방됐다, liberation from influence of sin)’는 ‘윤리적 의미’가 아닌, ‘죄책(guilt, 罪責)에서 해방됐다(liberation from guilt)’는 ‘법적 의미’이다. (이는 마치 ‘칭의’가 법적인 선언인 것과 같다.)
곧 율법을 이루어 ‘죄를 죄 되게 하는 율법의 요구에서 해방됐다’는 뜻이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함이니라(롬 7:8, 13).”
그리고 율법이 요구하는 ‘죄 삯(the wages of sin) 사망’은 오직 점 없고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피이다(벧전 1:18-19). 그의 피가 율법을 완성시켜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 1:5).”
물론 여기에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죄에서의 해방(liberation from sin)’을 인간의 행위완 무관하게 오직‘죄책(율법)에서의 해방(liberation from guilt)’에 두면, 죄의 남용자들에게 ‘나는 이제 율법에서 해방됐기에 어떤 짓을 해도 정죄받지 않는다’는 생각을 넣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죄를 가볍게 여기게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우려는 이해가 되나, 정반대의 우려도 있을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 말대로 죄의 남용을 우려하여 그것을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윤리적인 의미로 수납할 때, ‘완전주의(perfectionism)’에로 빠질 수 있다.
실제로 율법주의적인 청교도들(a legalistic puritans), 웨슬리안 완전주의자들(wesleyan perfectionists)은 그것의 부산물들이다.
우리는 진리의 오·남용자(誤濫用者)들을 두려워하여 진리를 말하기를 주저해선 안 된다. 어느 시대든 그런 자들은 있어왔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게 하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뿐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죄에서 해방했다’는 말은 ‘전혀 죄를 범하지 않게 됐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종에게서 해방됐다(liberation from the slavery of sin)’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율법에서 해방됨’으로서 더 이상 ‘죄의 종 된 상태(a state of slavery to sin)’에 있지 않게 됐다는 말이다. 그가 때때로 넘어지는 것은 그가 ‘죄의 종(slavery to sin)’이어서가 아닌, ‘육신의 약함(the weakness of the flesh)’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탄식한 것은 자신의 ‘죄의 종 됨에 대한 자각’에서가 아닌 ‘육신의 약함(마 26:41, 롬 7:18)에 대한 자각’에서였다.
그가 정말 ‘죄의 종 된 상태’에 있다면 그런 탄식을 안했을 것이다. 그 탄식은 오히려 ‘그가 죄의 종 된 상태에 있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다시 말하지만, ‘죄의 영향력에서의 해방(liberation from influence of sin)’과 ‘죄에서의 해방(liberation from sin)’은 동의어가 아니다.
누가 ‘죄에서 해방됐다’고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죄에서 해방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반대로 누가 ‘겉으로 무흠해 보인다’고 그가 ‘죄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죄에서의 해방’은 ‘칭의(justification)’의 문제이고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남’은 ‘성화(sanctification)’의 문제이다.
물론 둘은 서로 불가분의 인과(因果) 관계에 있지만, 둘이 ‘동일시(identification)’되거나 ‘상호 교호(interactiveness)’하진 않는다.
둘은 영역(營域)과 소관(所管)이 다르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둘을 ‘섞어찌개’로 만들 때, 로마천주교나 칭의 유보자들의 ‘왜곡된 칭의론’에 빠진다.
◈율법을 도말함으로
‘구원자(deliverer)’는 다른 말로 ‘승리자(winner)’이다. ‘포로’나 ‘위경에 빠진 자’를 건져내는 것이 ‘구원’이니, ‘승리자’만 구원자가 될 수 있다. ‘구원’은 승자의 전유물이고, ‘패자’에겐 그것이 요원하다.
하나님이 포로 된 이스라엘을 강한 바로(Pharaoh)의 손에서 구원해 내신 것은 그를 이긴 결과이다.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닛시(Jehovahnissi, God's flag of victory, 출 17:15)’인 것도, 그가 ‘승리자가 되심으로 구원자가 되셨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가 ‘백마를 탄 이긴 자(계 6:2)’로 등장한 것 역시, 그가 ‘승리자가 되어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상징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피 흘려 싸우셨고(히 12:4), 끝내 승리하여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리스도의 승리’는 세상 승리자들과는 다르게 ‘죽음을 통한 승리(victory through his death)’이다. 곧 사망에 삼키어 사망을 이기심으로(고전 15:54), 혹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율법을 도말함으로서이다.
‘율법’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주 타깃(main target)’이 된 것은 율법이 인간을 ‘정죄’하여 ‘사망’에 빠뜨리기에, 그것을 해결하지 않고선 ‘구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율법을 성취해 그들을 율법에서 해방시켰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4-15).” 이는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율법에 대한 승리’의 선포였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그리스도의 피’가 ‘최상위(最上位) 율법’을 정복하므로, 율법에 복속된 죄(요일 3:5), 사망(사 25:8, 딤전 1:10)까지 정복했다는 말이다(나아가 사망의 권세자 마귀까지 정복했다. 히 2:14, 창 3:15).
‘그리스도의 피’는 명실공히 택자를 장악하고 있던 모든 세력들을 정복하여, 그들을 완전한 구원으로 이끄셨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