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예수를 믿음
역설(paradox)로 들릴지 모르나, 그리스도인은 ‘산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죽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꽂힌 이들이나 부활주의자들(the Resurrectionists)이 들으면 ‘욱’ 할 말이다.
‘예수는 죽었다가 사셨고, 승천하여 지금도 하늘에 계신데 뭔 말이냐’고 할지 모른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만 말하는 것은 ‘미완(未完)의 복음’을 말하는 것이고, ‘부활’까지 말해야 비로소 완전한 복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여기서 ‘그의 죽음’을 강조하는 것은 ‘그의 부활’의 의미를 축소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자는 뜻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요 19:30)’고 하신 것은 ‘구속의 부분적 완성(completion of partial redemption)’을 의미했을 뿐, ‘구속의 전체적인 완성(completion of full redemption)’은 부활 때 이뤄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의 완성(had finished the work, 창 2:2)’처럼 ‘전체적인 완성’이다.)
그 근거로 그들은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는 말씀을 들고 나온다.
그들은 이것을 ‘그의 부활을 통해 비로소 우리의 칭의가 완성됐다’는 것으로 수납했다.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십자가 없인 부활도 없다(no cross, no resurrection)’는 말 역시 그들에겐 ‘십자가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수단’을 의미했다. 역사적으로 능력숭상자들(power pursuers)에게 ‘십자가’과 ‘부활’은 항상 그렇게 유비됐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는 말씀은 ‘그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의(義)가 완성됐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부활이 그의 죽음의 무죄성을 판명해 줬을 뿐더러, 그것(그의 무죄한 죽음)을 통해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았음을 확증했다’는 뜻이다.
◈예수 죽음의 비하와 승귀
정통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승귀(ascension, 昇貴)’로, 그의 죽음은 ‘비하(abasement, 卑下)’로 분류된다. 그리고 ‘후자’는 ‘전자’로 말미암아 승귀케 된다고 보았다. 올바른 적시(摘示)이며 성경적인 근거도 가졌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빌 2:8-9)”. 그러나 ‘그의 부활’을 지나치게 ‘그의 죽음의 결과물’ 혹은 ‘보상’으로 격하시켜 ‘후자의 의미’를 축소시켜선 안 된다.
‘그의 죽음’을 ‘그의 부활’과의 관계, 곧 ‘전자’를 ‘후자’의 예속물로만 보지 말고 그 자체의 독자적인 가치와 의미를 봐야 한다. 말하자면, ‘그의 죽음’에서 ‘비하와 승귀’를 동시에 봐야 한다는 말이다.
루터가 ‘십자가의 승리(the triumph of the cross)’라는 말을 즐겨 썼던 것도 ‘그리스도의 죽음’의 종속적 개념(subordinate concept)을 타파하고, 그것의 독자적인 가치를 돋보여 내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지 ‘부활 승귀(resurrection ascension)’에 이르는 과정이 아닌 ‘그 자체의 승귀(ascension of itself)’를 가졌다.
‘죄인의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존케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죄인의 구원을 그의 죽음에 의존시킴으로 그의 죽음을 승귀(昇貴)케 했다는 말이다.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기독교 핵심 교리는 ‘예수를 내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으면 구원얻는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으로부터 천국 열쇄를 받아내게 한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역사적인 신앙고백 역시 "예수는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죄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영접해 ‘구원’을 받으면 그의 죽음의 목적에 도달되고, 그의 죽음이 그에게서 영화롭게 된다.
◈죽은 예수를 전함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성만찬(Eucharist)의 가르침을 주면서 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the Lord's death)’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는 말씀에 근거한다.
바울은 이 말씀 따라 그의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헌신했다. 그에게 있어 ‘그의 죽음’은 그의 전부였다. 그의 유일의 지식이고(고전 2:2), 유일의 지혜였다(고전 1:24). 또한 그의 유일의 자랑이고(갈 6:14) 전도의 유일 주제였다(고전 1:22).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헌신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지고한 경륜이고 그를 영화롭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죄인은 ‘그의 죽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얻는다. ‘예수 믿어 구원 얻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내 죄 삯으로 믿어 구원 얻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6:54)”라고 하신 말씀은 ‘그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죄 삯, 롬 6:23)으로 받아들여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섬김’은 율법 중심의 ‘유대교적 섬김’과는 구분 짓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하나님 섬김’이다. 사도 바울이 “아들의 복음 안에서 섬기는 하나님(롬 1:9)’이라고 한 그 의미이다.
이를 해석하면, ‘아들의 죽음을 통해 섬기는 하나님’이라는 뜻 외에, ‘아들의 죽음을 가치롭게 하는 방법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기독교가 아들의 죽음을 전하는 ‘복음 전파’에 목을 매는 것도 이 말씀에 대한 순종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장사)를 위해 삼백 데니리온(300 pence, 오늘로 환산하면 약 4-5천만원) 이상 가는 옥합을 그의 머리에 부은 마리아(막 14:8)는 ‘그의 죽음’을 지성으로 섬긴 상징적인 사례로서,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우리 역시 ‘아들의 죽음’에 헌신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섬긴다. 아들의 죽음에 무관심한 채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예수님은 아들을 섬기는 것을 통해 아버지를 섬긴다(요 12:26)고 했다.
‘그의 죽으심’을 자랑하고 전파하는 것이 평생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그것을 듣는 택자를 구원한다. 오늘 당신이 헌신을 바치는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