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8.15 건국절 논쟁의 한복판에서
8월 15일, 광복절은 우리 민족이 기나긴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은 것을 기념하는 뜻깊은 날이다.
8·15는 동아시아 현대사의 기점이다. 식민지 지배나 침략에 시달린 여러 민족들에게는 해방과 독립을 가져다준 경축일이다.
동아시아는 제국, 식민지 체제에서 새로운 독립국가의 형성과 함께 냉전 체제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동아시아에서 일본제국주의 지배와 침략 전쟁의 유산이 완전히 청산되지 않고 있다.
최근 어느 정치인이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며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생각으로 새로 출발했으면 한다”고 건국 비판을 시작했다.
이런 맥락은 ‘독재자 이승만이 친일을 청산하지 못하고, 친일파를 앞세워 분단국가 만들고, 미국에 빌붙은 매국 세력들이 재벌과 관료를 등에 엎고 전쟁과 반민주적 시대를 통치했다’고 보는 1980년대의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한몫을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8·15는 해방, 독립, 광복의 세 가지 의미로 나타낸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해방’이라는 표현을 보게 되는데, 엄밀히 ‘해방’과 ‘광복’은 다른 것이다.
‘광복’은 주체적으로 국권을 회복하는 것인데 반해, ‘해방’은 타자에 의해 거저 받았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상해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우리 스스로 광복을 이루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에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주권은 거저 받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35년간 수십만 선열들이 피와 땀을 흘리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워서 쟁취한 소중한 결과물이다.
역사엔 부끄러움이 있다. 삶의 질곡을 이겨내지 못하고 불법을 묵인하고 받아들인 부끄러움, 권력 앞에 양심보다 머리를 숙인 부끄러움,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질병의 죽음 앞에 떠는 나약한 인간의 부끄러움이 통째로 들어있다.
그래서 역사는 부끄러움이다. 꼭 자랑스럽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도적같이 맞은 광복이 부끄러운 것인가. 세상에 100% 깨끗한 나라, 깨끗한 역사가 있을까.
상상 속 판타지 역사관이 지난 시절 한때 시대정신처럼 인식되기도 했지만, 현재의 달라진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생각을 바꾸는 게 옳은 지도자의 자세다.
‘태어나지 말아야 할 나라’, ‘병든 역사’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정통성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은 자기부정이요 모순이다.
현재 우리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를 계승한 정통성을 지닌 정부요, 이승만 등 건국의 아버지들이 현명한 선택으로, 공산화를 막고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을 만들어 왔다.
이런 광복은 우리가 보는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원자폭탄 하나 투하하고 일본 천황이 항복해서, 8월 15일 해방이 되자마자 온 민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것처럼 드라마틱하지 않았다.
당시 라디오 보급률이 일본인들의 절반도 되지 않을 정도였고, 일본 왕의 ‘절대항복’ 발언을 알아듣는 이도 드물었다.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치는 일은 다음 날인 8월 16일이 되어서야 퍼져 나갔다. 당일은 조용했고 만 하루가 지나서야 입소문을 통해서 독립의 기쁨을 만끽한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한 자유를 되찾았기 때문에, 이 땅의 일본군들은 모두 서둘러 도망치거나 숨었던 것도 아니다. 당시 일본군은 해방 후에도 일정 기간 무장을 하고 조선을 장악중이었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와 조선 주둔 일본군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치안권 등에 대한 합의를 진행했다. 특히 맥아더가 훈령을 통해 미국 군대 외에는 그 누구도 권한을 이양하지 말라는 지시에 돌변하기도 했다.
정작 일본군 무장해제는 미군이 진주한 9월 9일 이후부터 순차적으로 진행됐고, 일본군 출신을 우대하는 미군 사령부의 방침에 친일파들이 대거 몰리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해방 후 그토록 염원했던 태극기 게양도 사실 이뤄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본군과 조선총독부가 미군이 올 때까지 치안권을 유지하며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남산에 태극기를 다는 것으로 대신하며 만족해야 했다. 미군이 진주하고 조선 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9월 9일 총독부 건물에서 일장기가 내려지긴 했지만, 달린 것은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였고 1948년 정부수립 때까지 이 상태가 이어졌다.
8·15 민족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기회였다. 그러나 준비하지 못한 우리에게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민주와 공산, 좌우 진영 논리에 빠져 서로 대립하는 동안 주도권을 잃고 말았다.
1946년 8월 15일은 해방 1주년으로 비록 좌익과 우익으로 갈려져 기념식을 치렀으나, 그 후 전 민족적 기념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48년 8월 15일에 한국은 정부 수립을 선포함으로써, 이 날의 역사적 의의를 드높였다. 1949년 이후 8·15는 광복과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모습을 드러난 날이 되었다.
이처럼 광복절은 우리 근대사에서 많은 굴곡을 겪으며 이뤄낸 민족적 기념일이지만, 준비되지 않은 우리에겐 씁쓸한 모습이 자리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나 우리민족에게 있어, ‘해방’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 주신 기회를 선용하여 실력을 키우지 못하고, 스스로 갈등하므로 오히려 전쟁과 분단을 맞으며 민족통합 실패라는 유산을 남기고 있다.
그러기에 어려울 때일수록 국민의 민도(民度)를 높여야 하며, 교회가 민족을 일깨워 자립(自立), 자강(自强)의 실력을 키우고, 민족의 길을 내야 한다.
광복절을 다시 맞는다. 우리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의 어떤 잘못이나 더러움은 반성하고 다시 되풀이 하지 않도록 경계하면 될 일이지, 단지 과거의 사건을 논쟁거리로 삼고 부정적인 모습을 확산하는데 매달린다면 미래가 없다.
혹 오욕의 역사가 있다면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딛고 한반도의 통일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기원하는 영광스런 시대를 열어가는 날로 그 의미를 전환시켜 나가야 하지 않을까.
이효상 원장
근대문화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