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오직 성령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건 부흥회나 집회들이 크게 유행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것은 사람들의 관심 사안이 되고 있다.) 이에 못지 않게 그 문구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들도 많았었던 것 같다.
혹자는 그것을 ‘부흥사들’의 뻔한 외침쯤으로 여겼고, 혹자는 ‘신통방통한 비책’ 혹은 소수의 ‘영적 엘리트들의 독점적인 그 무엇’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인위적인 고안물도, 소수인들의 독점물만도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말씀’이다.
그 근거 구절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이다.
좁은 의미로 ‘구원은 오직 성령으로 된다’는 뜻이고, 넒은 의미론 ‘믿음’을 비롯해 모든 영적인 역사(役事)는 ‘오직 성령’으로 된다 는 뜻이다.
◈‘오직 믿음’이다
‘오직 성령’은 ‘오직 믿음’이라는 뜻이다. 이 구도는 ‘성령’은 오직 ‘믿음’에만 역사하신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
성경이 ‘믿음’이 아닌 ‘자기 의(義)’를 의지하는 자들을 향해 ‘성령을 거스리는 자들(행 7:51)’ 혹은 ‘성령이 없는 자들(유 1:19)’이라고 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사도 바울 역시 ‘성령 수납(to receive the Spirit, 갈 3:2)’을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적시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2, 5).”
“믿는 자의 받을 성령(요 7:39)”이라는 말씀도 ‘성령 수납’이 ‘믿음’에 의존됐음을 말한 것이다.
과거 무디신학교(Moody Bible Institute)의 교장이었던 아처 토레이(R. A. Torrey, 1856-1928) 목사가 ‘성령을 받기 위한 7가지 조건’같은 것을 제시한 것은 ‘믿음의 의의와 그 위대성’을 과소평가한데서 나온 결과물이다.
‘성령’은 오직 ‘믿음’으로 수납한다. 아니 ‘믿음’ 자체가 성령으로 말미암았다(갈 5:5).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예수를 주로 믿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된다는 말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예수님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한 것은, 그의 신앙이 ‘성령’으로 말미암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faith by Holy Spirit)’을 가진 자는 ‘믿음’에 의해 계속 성령의 부어짐(혹은 성령충만)을 받는다. 둘은 상호 순환 관계(circulatory relation) 속에서 서로를 고양(高揚)한다.
곧 ‘성령’으로 ‘믿음’이 주어지고, ‘믿음’에 의해 계속적으로 ‘성령’이 부어진다(혹은 성령 충만을 받는다, 갈 3:14, 엡 5:18).
◈‘오직 예수’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고(빌 1:19),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삼위일체(Trinity, 三位一體)’시다(요 15:26, 행 2:33). 그는(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삼위일체적(三位一體的)으로 존재하신다.
앞서 언급한 ‘믿음에 의한 성령 수납(to receive the Spirit by faith)’은 무슨 ‘믿음의 신통력’이 ‘성령’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이방 종교에서 행하는 ‘강신술(spiritualism, 降神術)의 영매(medium, 靈媒)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자 예수’를 받아들이니 그와 일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을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성자 예수’를 믿는 자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것은 당연하며, 오히려 그것을 특별한 일로 보는 것이 이상하다.
반면에 ‘믿음’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성자 예수’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그렇게 ‘성자 예수’를 의지하지 않으니 ‘삼위일체 성령’이 부어지지 않는 것이다.
성경이 ‘믿음을 부정하던 자들’을 향해 ‘성령이 없다(유 1:19)고 한 것은 그들에게 성령을 부르는 무슨 비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는 곳엔 ‘성자’와 ‘성부’가 안 계시고 그 두 위(位)로부터 나오시는 ‘성령’도 안 계시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컨대, ‘믿는 자의 받을 성령(요 7:39)’은 ‘성자 예수’를 믿는 자가 ‘성령을 수납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성령’은 오직 ‘성자와 성부와의 관계’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아래 구절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교호적인 관계(interactive relation)’를 말해준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빌 1:19)”.
◈‘오직 내 삶의 동력’이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성령이 내재하시면, 그때부터 그 안에 그리스도(성령)가 사신다. 자신이 그것을 인정하든 안 하든, 그리스도가(성령이) 주권적으로 그렇게 하신다. 다음의 사도 바울의 진술도 그것을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견지하고, ‘그를 즐거워’하고 ‘그의 뜻을 즐겨 순종’하게 하신다.
물론 그가 때때로 그의 이끄심을 거부 하므로 성령을 근심시키고(엡 4:30) 그의 역사(役事)를 지체시키기도 하지만, ‘그를 향한 당신의 뜻’을 반드시 성취시킨다.
그리고 그의 신앙이 성숙해짐에 따라 그로 하여금 성령의 이끄심을 자각하며 그를 힘입어 모든 것을 행하게 하신다.
예컨대 교회 봉사도 ‘오직 성령으로(빌 3:3)’ 하며, 누구를 사랑 할 때도 ‘성령으로(롬 15:30)’ 행하며, 복음을 전할 때도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이 아닌 성령의 가르치신 것(고전 2:13)”으로 하게 하신다.
이렇게 ‘성령의존적인 사람’이 될 때 그의 말, 봉사, 행위는 그의 능력, 학식, 언변과 상관없이 ‘생명의 파장(the wavelength of life)’을 일으킨다. 그가 의존한 ‘성령’이 그를 능력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반면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고, 많은 지식과 청산유수의 언변을 구비했어도, 성령의 이끄심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런 파장이 없다.
이 비밀을 안 후, 사도 바울은 ‘성령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알기로 작정(고전 2:3)’했고,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칠 때도 ‘지혜의 가르친 말’이 아닌 ‘성령의 가르치시는 것(고전 2:13)’으로 했다.
그가 이렇게 ‘성령의존적인 사람’이 되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말 많던 수다쟁이가(babbler, 행 17:18) ‘말이 시원찮은(speech contemptible, 고후 10:10) 눌변가’가 되어 있었다.
이는 그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지혜가 아닌 말의 지혜로 하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될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있었기 때문이다(고전 1:17).
그는 ‘오직 성령’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