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적 인간화와 성경적 새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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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칼럼] 피터 바이어하우스학회 발제 원고

본지 편집고문 김명혁 목사님의 바이어하우스학회 강의 내용입니다. 강의는 오는 11월 12일 진행됩니다. 김명혁 목사님은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명의 학자로 존 스토트 박사와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를 꼽습니다. 특히 바이어하우스 박사가 방한할 때마다 통역을 맡으며 가까이 교제했습니다. -편집자 주

▲김명혁 목사가 강의하고 있다. ⓒ크투 DB

▲김명혁 목사가 강의하고 있다. ⓒ크투 DB

오늘 주어진 제목은 “세속적 인간화와 성경적 새 사람” 입니다. 먼저 “세속적 인간화”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세속적 인간화”라는 말은 “성경적 새 사람”이 되기 이전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인데 이 세상의 다양한 종교적 윤리적 정치적인 이념에 치우쳐서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삶을 살아가는 죄인들의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죄인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몸에 심어 넣으신 착함을 아주 조금은 지닐 수도 있지만,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착함을 지니기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성경은 불신앙의 사람들이 지니게 된 세속적인 착함을 착하게 보지 않으면서 세상적인 것을 지니지 말라고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성경은 세상을 사랑하는 세속적인 사람들의 삶을 잘못된 삶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결국 이 세상의 다양한 종교적 윤리적 정치적인 이념에 치우쳐서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너무 부끄럽고 위태로운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유교적인 전통에 치우쳐 위선적으로 살아가는 삶도 불행한 삶이고 불교와 천도교에 치우쳤던 길선주 도사의 삶도 불행한 삶이었다고 지적합니다. 이 세상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이념에 치우쳐 세속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아주 불행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지적한 사람들은 모두 “세속적 인간화”에 치우쳤던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성경적 새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성경은 온갖 종류의 죄인들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회개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성경적 새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지적한 “세속적 인간화”에 치우쳐서 불행하게 살아가던 온갖 종류의 죄인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받고 회개하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게 되는, 그래서 “성경적 새 사람”이 되는 이야기를 그대로 하려고 합니다.

사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죄인들을 사랑하시면서 구원하시기 위해 취하신 일이었다고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요 3:16,17).

성자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세상에 오셔서 모든 고난과 핍박을 당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것은 죄인들과 병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취하신 일이었다고 성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그러면 먼저 구약에 나오는 니느웨 사람들을 성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신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구약의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게 되었는데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까지 즉 하나님에까지 상달했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욘 1,2).

결국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성부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하시게 되었고 요나를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심으로 나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니느웨 사람들은 “성경적 새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하늘에까지 상달한 니느웨 성 사람들과 동물들을 아끼며 사랑하시게 되었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는데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적국이요 원수의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서 온갖 학대를 자행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서 죽여 가죽을 벗겨 성벽에 걸어놓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우리 민족에게 온갖 학대를 자행한 일본에 비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앗수르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온갖 테러와 학대를 자행한 이스라엘의 적국이요 원수의 나라였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말을 빌리면 ‘악의 축’이었고 공격의 대상이었습니다.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나라와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 사람들과 동물들을 심판과 저주에서 구원하실 생각을 하셨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는 모릅니다. 아마 제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옛날 아브라함과 이사야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아브라함에게 이런 약속을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 그런데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니느웨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옛날 이사야에게는 이런 약속을 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그 날에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라.”(사 19:23, 24).

결국 성부 하나님께서는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앗수르 나라와 니느웨 성 사람들과 동물들을 가리키면서 “내가 (이들을)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라고 애타는 사랑의 심정을 토로하시면서, 저들을 전도하셔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내가 니느웨를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라는 말씀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국가정책에 위배되는 말씀이었고 보안법에 걸리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해석하면 “내가 북한의 김정일과 그의 군인들을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와 비슷한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결국 성부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성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달할 전도자를 보내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전도자로 택하셨습니다. 요나에게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욘 1:2).

그러나 요나는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는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욘 1:3).

그러나 성부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를 고기 뱃속에 잡아 넣으시면서 억지로 니느웨까지 가게 만드셨습니다. 니느웨를 향한 성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은 끈질기고 강했습니다.

결국 요나의 전도의 말씀을 들은 니느웨 성의 사람들과 짐승들이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욘 3:5). 결국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 3:10).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했고 세계 중에 복이 되었습니다. 악독한 한 나라를 변화시킨 것은 강력한 군사적 대응이 아니었습니다. 유엔의 결의안도 아니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긍휼과 요나의 회개와 간단한 전도였습니다. 앗수르와 니느웨를 향한 성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은 끈질기고 강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끈질기고 강한 그리고 모순되는듯하고 역설적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함의 자손이라고도 말하는 아프리카 사람들도 구원의 축복을 받게 되었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 중에서 이방인들인 조선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도 구원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뿐 아니라 동물들과 식물들에게까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1).

성부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전도의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이기적이고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요나까지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하신 이야기를 합니다. 요나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거역하고 반항하는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못된 요나를 버리시지 않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사심부름꾼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요나를 택하신 이유는 요나에게 배우고 깨닫고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이기적이고 배타적이고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못된 사람들을 아끼시고 사랑하시면서, 그와 같은 사람들을 택하시곤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못된 요나를 아끼시고 사랑하신 장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요나를 바다에 던져 물에 빠져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준비해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큰 물고기를 에비하사”(욘 1:17). 아마 상어가 삼켰다면 요나는 상어의 밥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상한 방법으로 죽어 마땅한 못된 요나를 살리셨고 그리고 니느웨 사람들을 살리셨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성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큰 물고기에게 명하사 산소를 공급하게 하셨고 얼마 후에는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욘 3:1).

요나는 두 번째 말씀에 할 수 없이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버려 마땅한 못된 우리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시곤 하십니다.

셋째로 니느웨 성이 구원의 축복을 받는 것을 보고 심히 싫어하고 노하고 반항하는 요나에게 박 넝쿨을 준비해서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가리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욘 4:6).

성부 하나님께서는 못된 우리들을 때로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보호하시고 때로는 바람과 비와 눈을 보내셔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아끼시곤 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넷째로 박 넝쿨이 시들자 요나는 성을 내면서 죽겠다고 야단을 쳤는데 죽겠다고 야단을 치는 요나를 친절하게 타이르셨습니다.

“내가 이들을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창조주 하나님께서 부족한 요나를 타이르시며 호소하시는 장면입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때려 죽여도 마땅할 요나를 부드러운 말씀으로 타이르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지몽매한 우리들을 마지막까지 타이르곤 하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망극하신 사랑에 대한 요나의 태도는 침묵의 시위였습니다. 침묵이 때로는 금이지만, 침묵이 때로는 불순종과 반항을 상징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결국 침묵으로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구원의 섭리를 섬세하게 적어서 발표하는 요나서를 썼다고 생각합니다.

불순종과 반항의 사람 요나는 결국 “세속적 인간화”에 사로잡혀서 살다가 “성경적 새 사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야말로 “세속적 인간화”에 사로잡혀서 살다가, “성경적 새 사람”으로 태어난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세 가지 해석이 있는데, 첫째 해석은 일곱 가지 귀신 들렸던 미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몸도 정신도 마음도 영혼도 모두 파괴되어서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었던 폐인이었습니다. 생각도 말도 제대로 못하고 음식도 잠도 일도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파괴된 폐인이었습니다.

둘째 해석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도덕한 길거리의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와 동일시합니다. 부도덕한 죄인인 한 여자에 대한 기사 바로 다음에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8장 초두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시몬에게 멸시를 당하던 길거리의 부도덕한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누가도 그 여자를 가리켜 “그 동네에 살던 죄인인 한 여자”라고 했습니다.

셋째 해석은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가지 죄악에 사로 잡혔던 전형적인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설교자 매클라렌이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일곱 귀신은 일곱 가지 죄악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곱 가지 죄악은 단테가 기술했던 일곱 가지 죄악인데 모든 죄악을 요약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 일곱 가지 죄악은 첫째 교만, 둘째 시기, 셋째 분노, 넷째 음란, 다섯째 탐욕, 여섯째 무절제, 일곱째 영적 게으름이라고 했습니다.

즉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가지 죄악에 덫에 걸려 있던 전형적인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막달라 마리아는 조만간 죄의 저주를 받아 사망에 들어갈 운명에 처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눈물의 회개와 성자 예수님의 지극하신 사랑으로 버림받아 마땅한 폐인으로부터 건짐을 받아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말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는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의 회개와 성자 예수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축복으로 구원함을 받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서술했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 7:36-50).

인간 쓰레기였던 막달라 마리아는 영원한 지옥의 저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죄악의 덫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삶과 운명은 완전하게 변화되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가까이에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는 성자 예수님 곁에는 성모 마리아와 사도 요한과 함께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다음 무덤에 묻히게 되었는데, 성자 예수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이 바로 막달라 아리아였습니다.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 28:1).

결국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에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을 제일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고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말씀하신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르니라”(요 20:16-18).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가지 귀신들렸던 인간 쓰레기였는데, 성자 예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과 가장 가까운 친밀한 교제와 사랑을 나눈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생생하게 증거한 너무너무 귀중한 보석과 같은 존재로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너무 놀라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속적 인간화”의 구덩이에 빠졌던 사람이었는데 “성경적 새 사람”의 대표적인 모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의 결과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오늘 “세속적 인간화와 성경적 새 사람“ 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세속적 인간화”는 우리들이 다가가기 쉬운 매력적인 상황이지만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성경적 새 사람“은 아주 귀중한 대상인데 본받기 쉬운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들은 “세속적 인간화”에 치우치기보다, “성경적 새 사람“에 치우쳐야 합니다. 성경 말씀 두 곳을 다시 인용하므로 강의를 마무리 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1 2:15-17).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
전 총신과 합신 교회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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