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믿음’에 대한 사전적 정의(定義)는 대개 이렇다.
“종교란 신이나 절대적인 힘을 통하여 인간의 고민을 해결하고 삶의 근본 목적을 찾는 문화 체계이다.”
“믿음이란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사랑·의뢰심을 갖는 일이다(국어사전).”
이런 정의들은 기독교의 ‘예수 신앙’과 공유되는 점이 별로 없다. 만일 이런 사전적 의미의 종교 관념으로 기독교에 접근했다면 실망하고 돌아갈 것이다.
◈파산자에게만 유효한 예수 신앙
‘예수 신앙’은 현재적 삶을 긍정하는 기반위에서 ‘뭔가의 상승’을 도모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제로 베이스(zero base)로 파산시킨 후 구원에로 이끈다. 말하자면 먼저 무너뜨리고 그 다음에 세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중생(regeneration, 重生)’이라 하며, ‘현재에 기반한 개량(improvement, 改良)’을 지향하는 일반 종교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율법(갈 3:24)’의 기능도 바로 그것이다. 죄인의 선(善), 가능성을 무(無)로 만들 뿐더러 그의 존재기반을 싹쓸이 부정한다.
‘예수 신앙’은 사실 ‘죽음의 직면’이다. 구체적으로 한 번 해부해 보자. “범죄한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20)”고 한 율법에 의해 인간은 한 번 죽음을 선고받고, 그 후 “죄삯 사망(롬 6:23)”을 지불하지 못해 또 한 번 ‘사망(저주)’를 선고받는다(롬 3:19). 그리고 심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하나의 죽음’인 ‘예수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로 보건대, ‘예수 신앙’은 한 마디로 ‘죽음에서 시작하여 죽음으로 귀결되는’ 죽음 일색(一色)이다. ‘소망’과 ‘생명’을 시사하는 그것의 겉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예수 신앙’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 다음 구절이 아닌가 싶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이다. 죄로 죽은 자가 ‘예수 죽음’을 받아들여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반면 자기가 죄로 죽었음을 인정하지 않고 기왕의 자기 삶을 긍정하는 기반 하에서 ‘자력갱생(自力更生)하려는 자’가 있다. 이런 사람을 성경은 ‘율법 아래 있는 자(갈 4:21)’혹은, ‘율법주의자’라고 하며, 그에게는 ‘예수 죽음’이 불필요하고 나아가 구원도 없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다시 말하지만,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말은 차력사(借力士)가 타력(他力)을 빌어 괴력을 행사하듯, 죄인이 ‘예수의 전능’을 빌어 자기의 구원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정의(定義)는 ‘죄로 죽은 자가 예수 죽음과 연합해 구원 얻는다’는 뜻이다.
‘소망’이라는 말도 오해가 없어야겠다. 그것은 자기에게 약간의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어정쩡한 절망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율법의 정죄로 완전히 사망선고를 받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 소망이신 예수는 자기에 대해 완전히 절망한 자 곧, 파산자(bankrupt)의 눈에만 들어온다(갈 4:23).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예수 신앙
죄로 죽은 자가 ‘예수 신앙’으로 구원받으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보인다. ‘구원’으로 감겼던 영안이 열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은 ‘구원’을 ‘하나님 아는 것’, ‘심판’을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동일시 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예수 신앙’은 단지 예수 신앙으로 그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자(聖子) 예수는 ‘사람 되어 오신 하나님(요 1:14)’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골 1:15)’이다.
따라서 성자에게로 가면 그에게로 간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일체(一體)이신 성부(聖父)에게로도 간 것이다. 그리고 일체이신 ‘성자’와 ‘성부’께로 가면, 두 위(位)로부터 나오시는 ‘성령(聖靈)’께로도 가게 되니 결과적으로 삼위일체(trinitas)께로 간 것이다.
그리고 ‘삼위(三位)의 현현(顯現)’의 시작과 중심엔 언제나 ‘성자’가 계신다. 이는 ‘삼위일체’께선 ‘성자’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현현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가 있는 곳에 ‘삼위일체’도 계시고, ‘성자’가 없는 곳엔 ‘삼위일체’도 없다. 성자를 부인하는 유대교도들(Judeas)이나 단일신론자들(monarchians)에게 ‘기독교적 의미의 하나님’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성자’가 계신 곳엔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procession, 發出)하신 ‘성령’도 계시고, 그가(성령이) ‘성자’와 ‘성부’를 연합시키시고 ‘신자(信者)’에게 두 위(位)를 일체적으로 계시하신다.
이렇게 ‘성부·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은 ‘성자’가 부정될 때 그것(성령)의 발출 기반이 없어지니 당연히 성령도 부정된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자들(liberal theology)이 일컫는 ‘성령’은 단지 ‘기괴한 악령(惡靈)’일 뿐 ‘삼위일체 성령’이 아니시다. 성령(?)을 부르는 그들의 의식이 초혼제(招魂祭)나 강신술(降神術)과 방불한 것은 당연하다.
성령은 그들처럼 특별한 제의(祭儀)나 의식(儀式)을 통해 현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곳에 현현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예수(성자) 신앙’역시 삼위일체적(三位一體的)이다. 우리가 ‘성자 신앙’, ‘성부 신앙’, ‘성령 신앙’을 따로 갖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컨대, ‘성자 신앙’은 ‘성부와 일체이신 성자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부 신앙’은 ‘성자와 일체이신 성부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 신앙’은 ‘성령과 일체이신 성부와 성자로 말미암아’ 믿는 ‘삼위일체적인 신앙’이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는 말씀 역시 이런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성자(예수) 신앙’과 ‘하나님 신앙’을 따로 가지라는 말이 아닌 ‘성부와 일체이신 성자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으라’는 뜻이다.
이제까지의 진술을 요약하면, ‘자기에게 절망하지 않는 자는 예수신앙을 가질 수 없고, 예수신앙을 못 가지면 삼위일체 신앙도 못 갖는다’이다.
이는 높고 위대한 삼위일체께서 가장 낮고 비천한 자에게 현현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삼위일체’ 신앙을 가지지 못한 이유 역시 오직 한 가지 때문이다. 자신들의 가능성에 도취되어 스스로에게 절망하지 않아서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