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국교회사 속 조용기 목사의 위치와 그 의의 (1)
조용기 목사 별세를 맞아, 박명수 박사님(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의 글을 소개합니다. 이 원고는 박사님의 <급하고, 강한 바람: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세계 오순절운동>에 수록된 것입니다. -편집자 주
들어가는 말
해방 후 한국교회의 지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등장이다.
실제로 해방 이후 한국교회사에서 오순절 신앙의 위치란 정말로 보잘것 없었다. 하지만 조용기 목사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시작하면서, 오순절 운동은 한국 교계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그 후 반세기가 되지 않아 한국교회 변두리에 있던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오순절 신앙은 한국 교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서울 변두리 불광동에서 시작하여 여의도에 자리를 잡은 것과 비슷하다.
본 논문은 과연 어떻게 한국교회의 변두리에 있던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한국교회의 중심에 설 수 있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한국교회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 신앙이 한국교회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한국교회의 중심에 서는 데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우선 한국교회 주류 교단이 이것을 막았다.
하지만 조용기 목사가 강조하는 오중복음은 주류 교단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조용기 목사는 한국교회의 대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잡지와 방송을 통하여 널리 전하게 되었다.
사실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한국교회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1990년대를 전후해서이지만, 이미 조용기 목사의 메시지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중심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조용기 목사의 메시지가 먼저 사람들을 사로잡은 다음에, 조용기 목사는 한국교회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과연 어떻게 조용기 목사와 순복음 신앙이 한국교회의 변두리에서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를 교계의 구조, 신앙의 구조, 한국 사회의 변화. 매스컴의 구조 등의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아울러 이렇게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이제 생겨나는 문제는 무엇이고,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I.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해방 이후 순복음교회의 역사와 한국교회
1. 한국 교계의 구조와 여의도순복음교회
해방 후 한국 교계의 가장 큰 변화는 오순절 신앙의 등장이었다. 일제 시대부터 오순절 운동은 한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이것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오순절 운동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2월 미국 하나님의성회 선교사 체스넛(Arthur B. Chesnut)이 한국에 내한하여 기존의 오순절 신자들과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의성회’를 시작했을 때였다. 이들은 순복음신학교를 세우고 사역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는데, 1956년 조용기 목사가 여기에 입학하게 되었다.
조용기 목사는 신학교에서 최자실 목사를 만나게 되고, 이 두 사람은 졸업 후 함께 1958년 대조동순복음교회를 개척하게 된다. 그리고 이 교회는 1960년대 초 서대문으로 옮겨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하나님의성회는 도시를 집중적으로 선교하는 정책을 사용했고, 그 일원으로 서대문에 전도관을 세워 조용기 목사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여기서 조용기 목사는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73년 순복음교회는 여의도로 다시 한 번 옮겼다. 당시 여의도는 완전히 허허벌판이었다. 하지만 여의도는 장차 서울의 중심이 될 신흥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조용기 목사는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웠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하나님의교회도 성장하였고, 이제 순복음교회는 한국교회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사실 대조동은 서울의 변두리였다. 하지만 조용기 목사는 대조동에 머물지 않고, 서대문을 거쳐 여의도에 자리잡았다. 당시 여의도는 지리적으로는 서울의 중심이었지만,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아 빈 공간이었다.
하지만 서울의 발달과 더불어 여의도는 비약적으로 개발되었고, 결국 강남과 강북을 잇는 중심지일 뿐 아니라 국회와 금융계가 자리잡는 서울의 중심지가 되었다. 여의도가 대한민국의 중심지가 되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도 한국교회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그저 아무 희생도 치르지 않고, 한국교회의 중심에 자리잡게 된 것은 아니다. 사실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중심은 영락교회였다. 영락교회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교단인 장로교 통합 측 소속이며, 담임목사는 한국 교계에서 널리 존경받는 한경직 목사였다.
하지만 한경직 목사는 1973년 영락교회를 사임하고 한국교회 전체를 위해 일했다.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만의 목사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목사였다. 영락교회는 새로 부임한 박조준 목사의 지도 아래 크게 부흥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를 지나가면서 영락교회는 당회장과 당회원 사이의 갈등을 겪었다. 급기야 영락교회는 담임목사가 사임을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조용기라는 작은 교단 목사의 목회 아래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영락교회도 부흥하고 있었지만, 그 숫자에 있어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훨씬 앞섰다. 하지만 그 상징성에 있어서는 여전히 영락교회가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1983년 장로교 통합 측이 제기한 여의도순복음교회 사이비 시비 문제이다. 통합 측은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나타난 몇 가지 윤리적인 문제와 함께, 교리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교리적인 문제는 방언과 성령세례의 관계, 신유, 축복의 문제였다. 통합 측이 제기한 교리적인 문제는 사실 오순절 신학에 대한 장로교의 공격이었다. 장로교 통합 측은 1983년 총회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와의 연합활동을 금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이것은 여의도순복음교회로서는 매우 큰 충격이었다. 한국의 주류 교단으로부터 제기된 사이비 시비에 휘말린 것은 여의도순복음교회로서는 결정적인 타격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80년 이후 한국교회의 흐름은 통합 측의 결정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1980년대 한국교회는 수많은 대형집회를 갖게 되었고, 그 장소는 대부분 여의도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형집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지원을 받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았다.
장로교 통합 측과 여의도순복음교회 사이에 갈등이 야기된 다음, 1984년 열린 한국 기독교선교 100주년 선교대회에 조용기 목사가 주강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청됐다.
이 대회는 한국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연합모임이었고, 통합 측 한경직 목사가 그 대표를 맡고 있었다. 이것은 통합 측의 주장이 한국 교계에서 널리 공인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비록 한국의 주류 교단은 조용기 목사를 이단시했지만, 한국 기독교인들 다수는 조용기 목사의 설교에 큰 감화를 받았다. 결국 이와 같은 대중적 지지가 힘이 되어,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사이비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조용기 목사는 주류 한국교회의 무대에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1992년 ‘세계성령화대성회’에서 조용기 목사는 총재직과 주 강사직을 맡았고, 통합 측 신현균 목사가 부총재직을 맡았다.
결국 가서는 통합 측 자체도 1994년 그간 교리적 문제는 성경에 대한 교파 간의 신학적 차이라고 양해했다. 이것으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한국교회의 주류교회로 등장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장애를 넘은 것이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수많은 이단이 나타났다. 우리는 정통 기독교를 수호하기 위하여 잘못된 이단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 많은 경우 이단 혹은 사이비의 이름으로 새로운 신앙운동이 정죄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루터는 천주교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당했다. 종교사회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주류 기독교는 새로운 신앙 운동이 종교 시장에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한국교회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성결교회도 1930년대 장로교로부터 이단 시비에 휩싸인 적이 있다.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에서 성결교회는 상당한 부흥을 했다. 장로교는 이것을 보며 신자들에게 성결교회에는 이명증서를 주지 말 것을 결의하였다. 비록 1년 후에 이것은 철회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상당했다.
개신교는 다양한 교파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문제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 이상, 서로 간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결국 장로교 통합 측 총회도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학적 특성을 인정했다.
순복음교회는 이제 한국교회에서 더 이상 비주류가 아니다. 그렇다면 순복음교회 역시 다른 교파나 신앙운동에 대해 신학적 차이나 강조점의 차이를 인정하는 넓은 포용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이단 사이비 시비를 넘어서서 한국교회의 주류에 편입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신학에 대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자세이다.
대부분의 오순절 교파들은 신학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신앙 변증을 게을리한다. 하지만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국제신학연구원을 만들어 오순절 신학을 정립하고, 국외와 국내 신학자들을 초청하여 자신들의 신학을 연구하게 하였다. 이것을 통하여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많은 부분 신학적으로 해명되었다.
최근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운동은 보다 폭을 넓혀 가고 있다. 1997년 하나님의성회는 NCC(현 NCCK)에 가입하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에서 오순절 운동은 주류 교회로부터 소외를 당하였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한국의 주류 교단의 연합체에 속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NCC 역시 외국의 원조가 중단되어 순복음교회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울러 전 세계적으로 WCC와 오순절교단의 대화가 전개되고 있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보수/복음주의에 속해있던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진보그룹을 대변하는 NCC에 가입한 것이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NCC에 가입하여 신학위원장을 맡았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즉, 한국교회는 하나님의성회를 한국의 주요 교단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해방 후 군소교단의 변두리 교회에서 지금은 세계 최대교회이며 동시에 한국의 주류교단 가운데 하나로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순복음교회가 운영하는 국민일보는 한국교회의 신문이며, 이 신문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를 향하여 발언하고 있다. 순복음교회는 한국교회의 입을 주관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세계의 오순절 교단 가운데서 여의도순복음교회처럼 주류 교단에 편입된 교회들은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박명수 박사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