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생명을 이긴 이래, 율법 아래 있는 인류는 사망이 생명을 이기는 것으로 돼 있었다. 다음 구절은 그것의 대헌장(大憲章)과도 같은 말씀이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
따라서 아담 이래로 인류는 ‘생명’을 산 것이 아니라, ‘죽음’을 살았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의 외양은 생명인 것 같으나 사실 그것은 ‘생명으로 포장된 사망’이었다.
그것의 진면목은 불택자가 사후(死後)에 직면할 ‘둘째 사망(계 20:14, the second death)’을 통해 적나라(赤裸裸)해진다(물론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택자는 천국을 직면한다).
◈사망으로 사망을 이김
비로소 ‘생명다운 생명’ 곧 ‘참 생명’이 세상 끝에 나타났다(히 9:26). ‘사망을 이기는 생명’이 나타난 것이다. 그가 곧 성자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요일 1:2).”
그는 ‘하나님의 생명’이었고 택자에게 그것을 주려고 나타나셨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그리고 ‘그 생명’은 ‘그의 죽음’을 통해 그들에게 제공됐고, 택자는 그의 죽음을 영접해 그것(그의 생명)을 획득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사망 아래 있던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께 ‘죄삯’으로 지불해 사망의 굴레를 벗는다. 흔히 ‘예수 부활의 생명이 사망을 이겼다’고들 하나, 실은 ‘예수의 죽음이 사망을 이겼다’고 함이 정확하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죽음의 변증법적 관계’는 ‘피의 이중적 의미’, 곧 “피가 몸 안에 있을 땐 ‘생명’이고 몸 밖에 있을 땐 ‘죽음’”이라는 점에 빗댈 때 이해력을 북돋을 수 있다. 다음 구절은 그것의 적절한 예시로 보인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생명이 피에 있음이라’… ‘단에 뿌려’…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는 말씀은 ‘몸 안의 피’가 ‘몸 밖의 피’로 유출될 때 죽음이 되고, 그 죽음이 죄를 속한다’는 말이다. 이를 그리스도께 적용하면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피가 십자가에서 유출됨(죽음)으로 우리 죄를 속했다’는 말이다.
‘반석이 구원이 되는 원리(시 95:1)’를 통해서도 ‘그리스도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깨어질 수 없는 강한 반석’으로서가 아니라 ‘약하여 자신을 깨뜨림(고후 13:4)’으로서이다.
이는 ‘구원의 반석’에 대한 일반의 인식과는 사뭇 다르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깨어진 반석(시 105:41)인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에서 ‘의의 생수’를 흘려내어 우리를 구원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는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의 출현이 사망을 폐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두 죽음을 폐하심
인간의 죽음은 ‘이중적(twofold)’이다. 첫 번째는 ‘죄로 인한 죽음’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
그러나 이 ‘첫 번째 죽음’은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에게 ‘영육(靈肉)의 죽음’이 왔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삯 사망(롬 6:23)”을 하나님께 지불하므로 살아날 수 있게 하셨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이 은혜를 입었다.
‘두 번째 죽음’은 ‘죄 삯 사망을 지불 못한 결과’로서 사후(死後)에 맞는 심판(히 9:27)인 ‘둘째 사망’이다. 불신자로 살다가 죽은 이들이 맞닥뜨릴 불행이다.
‘전자’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선택적이다. ‘그리스도로부터의 죄삯 사망’을 전가(轉嫁)받으면 이를 피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전자에 대해선 ‘죄사함(the forgiveness of sins)’으로, 후자에 대해선 ‘구속(redemption)’으로 죄인을 죽음에서 건져냈다(골 1:14).
죄인의 죽음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려면 그의 ‘생물학적 죽음(biological death)’과 ‘법적 죽음(legal death)’을 구분해야 한다.
‘생물학적 죽음’을 ‘법적 죽음’으로, 혹은 ‘법적 죽음’을 ‘생물학적 죽음’으로 왜곡할 때,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불가능해진다.
아담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한 계명을 어겼을 때 당장 ‘생물학적인 죽음’은 오지 않았다(물론 이 때 이미 ‘생물학적인 죽음’이 숙명이 됐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엡 2:1)”라는 말씀 그대로, 그 때의 그의 죽음은 법(관계)적인 것이었다. 그의 육체의 죽음은 한참 후에야 왔다.
반대로 ‘생물학적(biological, 生物學的)’으로는 죽었지만 ‘법적(legal, 法的)’으로는 사는 경우이다. 곧 육체는 ‘죽어야 할 운명(mortal)’ 혹은 ‘죽음의 지배 아래’ 놓였으면서도 ‘법적’으로는 죽지 않은 경우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mortal, 죽을 운명에 처해있으나-필자 주)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 8:10).”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로 인해 몸은 ‘죽을 운명에 처해(mortal)’ 있으나 법(관계)적으론 그리스도를 믿어 죽음에서 해방됐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러나 그리스도 재림시 그의 영화로운 몸에로의 변환을 통해, 자신에게서 ‘법적인 죽음’, ‘생물학적 죽음’ 모두가 벗겨지는(요일 3:2) ‘죽음의 완전한 폐지’를 보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