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칼럼] 오징어 게임이 뭐라고
※본 칼럼에는 다소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편집자 주
요즘 세계 문화를 주름잡고 있는 한국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아주 큰 화제가 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문화의 메카 헐리우드를 뒤흔들고 있고, 철옹성이라는 인도 시장까지 점령하며, 다큐도 출시된다 하니, 과연 전 세계 시민들의 반응이 놀랍다.
참으로 반가운 것은 한국의 음악이나 드라마 등 한류 열풍이 매우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데, 그 열기는 날이 갈수록 더해갈 것 같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88 올림픽을 통해서 전 세계에 알려지고 그 위상이 대폭 상승하였다. 이제는 각종 문화와 정치와 경제, 군사, 기술적인 모든 면에서 세계인들의 마음을 빼앗을 정도로 국격이나 위상이 매우 높아졌다는 것이다.
2021년 9월 UN 총회 현장에서 BTS가 열창하고 춤을 추면서 전 세계인의 마음에 감동을 선물한 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참으로 놀랍고 대단한 일이라 하겠다.
<오징어 게임>이 왜 그토록 세계인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을까? 어찌하여 전혀 다른 문화에서 발생한 게임이 그들의 마음과 눈을 빼앗게 된 것일까. 게임에서 진 사람은 무자비하게 머리통이 날아가면서 살해되는 끔찍함, 잔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많은 게임에서 나타나는 갈등과 경쟁과 돈을 향한 인간의 슬픈 노력이 나에게 동일화되어 심장을 파고드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선하고 아름답고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그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이 게임에서 보게 되는데, 그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악이다.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씀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악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끔찍한 장면을 보면서 경악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을 즐기는 인간의 이중성을 보면서 사람들은 공감하게 된다.
톨스토이 유명한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란 책 속에서, 죽은 사람의 장례식에 참석한 친구, 속으로 내 뱉은 그의 말에서 인간의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저기 관에 누워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그런데 한 가지 아직 골치 아픈 것은 저 친구의 유족을 만나 슬픈 표정으로 위로를 해야 하는 불편한 과정이 남아있는 것이지”.
‘오징어 게임’의 최종 목표는 돈이다. 실패한 인생들 456명이 모여서 각각 1억 몸값으로 총 456억 일확천금을 노리는 게임이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실패한 인생들, 경제적 약자와 파산자들, 그래서 결국은 돈에 쪼들리고, 도망자가 되고, 돈에 짓눌린 인생들에게 목숨을 건 게임에 초청된다. 최종 승자가 타인의 몫까지 챙겨가는 생명을 건 한 판의 도박인 것이다.
첫째, 문화와 인종을 초월하면서 세계인을 열광시키는 이유는 그들에게 공감이라는 감성이 작동하고 있다. ‘맞아’, ‘우리도 그래’, ‘나도 그렇게 당했어’라고 하는 공감을 유발하기에, 그들도 역시 공정성을 깨고 불법 다운을 하여 시청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 공감이라는 것은 바로 ‘공정성과 불평등’이다. 이 게임에서 규칙의 게임은 모두에게 공정하다. 그러나 실제 게임은 매우 불평등하게 진행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공정성과 불평등 시비는 모든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전 세계 모든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성경에서는 아주 오래 전에 공정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고린도전서 6:12)”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은 다 다르지만, 게임의 규칙은 다 같이 적용되는 불공정함이다. 공정을 외치지만, 현실의 삶은 매우 불평등한 삶을 드러내고 있다.
둘째, 조금만 눈을 뜨고 사회를 이해하게 되면, 공정에서 파생되는 문제인 ‘불평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곧바로 알게 된다.
세상과 사회에 대하여 이렇게 눈을 뜨면 흔히 말하는 진보주의자가 되고, 모르고 덮어놓고 사회에 순응하여 열심히 살아가게 되면 보수 혹은 수구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보수 혹은 진보주의자가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필자 같은 경우, 그거 별거 아니다. 어느 한 순간 사안에 따라 공정에 관계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현실의 삶이 지옥 같은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매일 죽음의 기운을 느끼고 살면서 몸부림친다.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지만,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은 너무 견고해 바꿀 수 없다. 구조적 모순으로 합의도 안 된다. 멈출 수 없어 계속 달려가야 하는 울타리에 갇힌 인생이 되어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이 게임에서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에, 문화와 인종을 초월하여 세계인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흔히 보수주의 목사들은 말한다. 그러한 세상 드라마에 마음과 생각을 빼앗기지 말고, 그럴 시간 있으면 성경 한 장 더 보고 기도에 전념하라고.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참 무식하고 편협한 태도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교회와 목사의 존재 이유는 세상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 그리고 등불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 사람들의 생각 흐름과 삶의 갈등 문제를 모른 채, 무엇을 설교하고 어떻게 설득하겠다는 것인가. 모든 것을 성경으로 다 해결하려고 하는(오해 금지), 이런 측면에서 보수는 ‘수구 꼴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치열한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되면 그대로 머리통이 박살나 죽어가는 치열한 자본주의 삶의 현장인 것이다. 먼저 달려나가고 게임에서 이긴 놈이 승자가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의 삶, 함께 공존하는 세상이 아니다. 약자를 도와주고 함께 고난을 나누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게임의 세상이다.
셋째, 실제 게임을 살펴보면 한국에서 한 세대 이전 대부분 어린시절에 즐기던 것들이다. 도시화 되어버린 오늘의 사회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게임’, ‘구슬치기’, ‘줄다리기’, ‘유리창 다리 건너기’, ‘오징어 게임’. 이러한 게임 속에서 인간의 욕망과 경쟁과 갈등이 그대로 노출된다.
구슬 게임은 2인 1조가 되어 시작했다. 형으로 따르던 친구와 한 조를 만들었다. 가장 친한 사람들끼리, 믿을만한 사람, 서로 잘 도와주었던 사람끼리 짝을 지어서 한 조가 된다. 한 부부도 있었다.
서로 도우면서 게임을 하기 위함이었는데, 알고 보니 서로 적수가 되어 주어진 구슬을 다 따먹어서 이겨야 하는 운명의 장난이 된 것이다.
형처럼 따르던 사람에게, 가장 친하던 사람에게 속임과 배신을 당한다. 치매기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던 할아버지를 속이고 승자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있었다.
한 팀을 이뤘던 부부는 부인이 져 주었는지, 머리통이 날아가는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를 지켜보는 남편의 가슴은 찢어진다. 결국 남편은 승자의 반열에 서 있었지만, 곧바로 목을 매 자살하게 된다. 무서운 윤리·도덕적 죄책감에 시달린 것이다.
죽음이냐 삶이냐 하는 선택 앞에서, 자신의 이익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갈등과 ‘죄책감’을 공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누구나 한 번은 거짓말을 하면서 이익을 추구했던 경험들은 바로 나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줄다리기 도중에, 기독교인 남성이 등장한다. 줄다리기를 하기 전에 이 게임을 꼭 이기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한다.
오늘날 목사들의 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결국 줄다리기에서 승리하고 상대편은 모두 떨어져 죽게 된다. 그리고 그 목사를 비난하는 이들에게, “어차피 죽을 인생 먼저 보내드렸다”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은 이 장면에서 분노한다. 왜 이런 드라마에 목사를 등장시켜 교회와 목사를 욕하게 만드는가? “문화를 통한 기독교 탄압”이라고 말한다. 불교의 승려나 천주교 신부는 등장시키지 않고 왜 목사만 등장시켜 명예를 훼손하는가 하고 심히 불평한다.
필자도 거기에 공감을 한다. 그런데 불교나 천주교는 한국 사회에서 교회만큼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기에, 사람들의 관심 밖이지 않는가?
정해진 시간에 유리가 깔린 다리를 건너는 게임, 한 장은 두꺼운 것이고 한 장은 얇은 유리이다. 선택을 해야 하는 운명의 길이다. 맨 앞에 선 사람이 잘못 선택함으로 떨어져 죽는 장면에서, 모두가 공포심을 느낀다. 뒤를 따르는 사람이 선두가 되어 길을 개척해야 한다.
무서워 나가지 못하는 사람을 밀쳐서 죽게 만들고, 한 걸음 나간다. 앙심을 품고 있던 원수 같은 남녀가 외통수에서 만난다. 여인은 한을 품어, 그 남자를 껴안고 아래로 함께 떨어져 피가 터진다.
아, 역시 살면서 원수를 만들어서는 안 되겠구나. 언젠가 때가 되면 되돌려 받겠구나 라는 공감대는 모든 문화와 인종을 초월해 이 드라마 게임에 열광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최후의 승자, 수백 억원이 든 카드를 손에 들고 돈을 찾는다. 1만원, 그리고 다시 실패한 인생의 삶을 이어서 살게 된다. 목숨을 걸고 게임에서 승자가 되어 수백 억원을 가졌지만, 사용하지도 않고 실패한 인생을 그대로 사는 것이다. 여기서 번뜩거리는 질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유하고 성공하려고 발버둥치지만, 정녕 자기에게 주어지면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저렇게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이다. 주어진 삶의 환경과 가족, 건강, 여건 속에서 풍성한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것만 보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대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로 인하여 축복된 인생을 약속 받고 누리고 즐기고 살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근심과 염려,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또한 알게 된다. 얼마나 억울한 인생인가?
수백억 원을 하나도 사용 못하고 살아가는 드라마 속 인생이나, 영원한 창조주를 아버지로 믿고 살면서도 약속한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나 별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해주는 데서, 이 드라마는 매우 의미가 있다. 세계인이 열광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인생과 삶을 깨닫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은총의 영역인 문화 예술, 자연세계를 통해서도 많이 배우고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도 열심히 연구하여야 하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잘 배워야 한다. 문학, 역사, 철학도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세상과 삶의 현장(코로나19를 비롯한)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다.
시간을 내 시청해볼 만한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한 번 토론이라도 해 보면, 다양한 생각들로 인하여 얼마나 깊어질까! 풍성한 가을이다. 우리의 정서가 더 풍요로워지면 우리의 신앙도 더욱 확신에 차게 될 것이다.
세르게이 모스크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