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국교회사 속 조용기 목사의 위치와 그 의의 (3)
몰트만, 종말론적 희망으로 세상 변화시킬 것 주장
그의 ‘희망의 신학’, 궁극적으로 혁명의 신학
조용기, 성령으로 자신의 가능성 개발과 노력 강조
새로운 미래 바라보는 자기 개혁의 신학 주장
하비 콕스 “조용기 희망의 신학, 자본주의 모티브”
조용기 설교, 한국 사회가 과격 혁명 대신
점진적 발전으로 나가게 만든 중요 요인
산업화 부작용 생기자 이웃돕기도 적극
조용기 목사 별세를 맞아, 박명수 박사님(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의 글을 소개합니다. 이 원고는 박사님의 <급하고, 강한 바람: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세계 오순절운동>에 수록된 것입니다. -편집자 주
3. 한국 사회의 변화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한국 최대 교회가 된 것은 무엇보다도 변화하는 한국 사회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와중에서 조용기 목사는 미국 오순절 선교사를 만났고, 그를 통해서 오순절 신앙을 배웠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 순복음신학교를 다녔다. 한국전쟁의 고통을 삶으로 체험한 조용기 목사는 1958년 서울 대조동에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 후 그의 교회는 대한민국의 발전과 함께 성장하였다.
해방 후 한국교회 주류는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이었다. 영락교회와 충현교회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들 교회는 피난민을 중심으로 대형교회가 되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반공이었다.
하지만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피난민으로 이루어진 교회가 아니다.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북한에서 내려온 기독교인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도시로 모여든 이주민들로 이루어졌다.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자유를 찾아 내려왔지만,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서울에 온 것이다.
여기서 조용기 목사의 메시지 핵심이 나온다. 그것은 ‘희망’이다. 자신이 절망 가운데 있으면서 희망이라는 꿈을 가진 것처럼, 그는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다.
조용기 목사는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의 시대는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일제시대는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설교의 내용이 현실도피적인 재림 사상이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는 다르다.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자유가 보장되었다. 이제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때이다. 따라서 조용기 목사는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필요한 메시지는 현실도피가 아닌 희망의 메시지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몰트만이 말하는 희망과는 다르다. 몰트만은 근본적으로 사회를 현실 사회의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며 종말론적인 희망으로 세상을 혁명으로 변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그의 희망의 신학은 궁극적으로 ‘혁명의 신학’이다.
하지만 조용기 목사의 희망의 신학은 다르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 속에 있는 가능성을 개발하여 열심히 노력하여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는 ‘자기 개혁의 신학’이다.
그래서 하비 콕스는 “조용기 목사의 희망의 신학은 바로 베버가 말하는 근면을 강조하여 자본주의를 만드는 모티브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였다.
사실 이와 같은 조용기 목사의 희망의 신학은 산업화 시대에 가장 적절한 메시지였다.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낙심하기 쉽다. 하지만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통해 이들은 다시금 희망을 찾게 된다. 이들은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희망을 갖고 노력한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메시지이다.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지 못하면 그 다음에 좌절하게 되고, 좌절은 유토피아를 꿈꾸게 하고, 이런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의 평등한 세계는 매력적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조용기 목사의 희망의 설교는 한국 사회가 과격한 혁명보다, 점진적인 발전으로 나가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박정희 시대에 큰 성장을 이루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대한민국은 북한과 체제 경쟁 상태였다. 여기서 반공은 제1의 국시였다. 이 시대 한국 사회는 월남전을 거치면서 공산주의와 대립하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끊임없는 공비의 남침 사건이 있었다.
특히 1970년대 중반 월남의 패망은 한국 기독교에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런 가운데 한국교회는 반공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 시대에 조용기 목사 역시 반공의 대열에 서 있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조용기 목사는 공산주의야말로 말세에 등장하는 적그리스도라고 설명하였다. 실로 공산주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살해한 기독교의 반대 세력이었다. 필자는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이와 같은 체제 경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요 세력으로 위치를 분명히 했다고 본다.
바로 박정희 정권이 산업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나타나게 된 것이 바로 도시화 현상이다. 당시 서울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수많은 시골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었고, 이들은 고향 친척을 떠나 소속감을 잃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이들에게 소속감을 심어 주었다. 다시 말하면 농촌의 가족들이 했던 역할을 순복음교회의 ‘구역’이 해 준 것이다. 아니, 가족보다 더 큰 역할을 해 주었다.
구역장들은 구역 식구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이해하며, 그들의 기도제목을 갖고 파주 오산리 금식기도원에 가서 함께 기도하였다. 사실 순복음교회의 구역예배는 사막과 같은 도시에서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산업화는 여기에 따른 수많은 부작용을 가져왔다. 소위 ‘압축 성장’은 이 땅에 수많은 그늘을 만들어 놓았고,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사회는 이런 압축성장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85년 엘림타운을 만들고 불우 청소년과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사회복지법인 엘림복지타운을 만들었으며, 2008년 조용기 목사의 은퇴와 더불어 ‘사랑과 행복 나눔 운동’을 통하여 한국 사회의 구석, 구석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사업은 조용기 목사가 은퇴 후 벌인 마지막 사업으로서, 그는 사회봉사로서 그의 인생을 마지막을 정리하고자 했다.
이와 같이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한국 현대사와 함께 발전하여 왔다. 한국 사회가 희망이 없을 때 희망을 전했고, 산업화 시대에 근면을 가르쳤으며, 도시화 가운데 오아시스의 역할을 했고, 국가의 정체성이 위태로울 때 대한민국을 지켰으며, 압축 성장의 문제가 드러났을 때 그 아픔을 치유하고자 했다. 조용기 목사는 은퇴 후 마지막 힘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하고 있다.
박명수 박사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