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칼럼] 한글, 위대한 활자의 탄생과 전파 이야기
한국인 자랑거리 넘어, 인류 위대한 지적 유산
기독교, ‘한글’이라는 통로로 우리 민족에 전파
선교사들, 한글 보급 위해 사전 등 연구와 출판
훈민정음 반포 575돌과 93주년 한글날을 지나며 세종대왕이 반포한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고, 그 고마움을 마음에 깊이 새기게 되었다.
세계에 이런 문자는 없었다. 세계 문자 가운데 ‘한글’, 특히 ‘훈민정음’은 흔히들 신비로운 문자라 부르곤 한다. 그것은 세계 문자 가운데 유일하게 한글만이 그것을 만든 사람과 반포일을 알며,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알기 때문이다.
한글은 사람의 소리를 기호로 나타낸 표음문자로서, 음절을 닿소리와 홀소리로 나누고, 받침은 닿소리가 다시 쓰이게 함으로써 가장 경제적인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음절 구성 원리도 간단하여 배우기 쉬운 문자로 세계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한글’은 단지 한국인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이다. 영국 샘슨(Geoffrey Sampson)교수는 “한글은 의문의 여지 없이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지적 유산의 하나임에 틀림없다”고 단언했고, 미국잡지 <라이프>의 밀레니엄 특집호에서 21세기를 맞아 지난 천 년 동안 일어난 가장 역사적인 일로 금속활자와 인쇄술 발명을 1위로 선정한 바 있다.
한글 훈민정음 해례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고 현재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는데, 사실 국보 1호는 남대문보다 ‘한글’로 바꾸면 좋을 것 같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지은 책의 제목이자 오늘날 한글로 불리게 된 한국어의 표기 문자 체계를 말한다.
1443년(세종 25)에 조선 4대 세종(世宗)대왕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만든 자음 17자, 모음 11자로, 모두 28자로 이루어졌다.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후, 1446년 음력 9월 이를 반포했다.
이 때 ‘훈민정음 해례본’은 판각 원본으로 전권 33장 1책으로 되어 있고,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를 밝힌 서문인 예의(例義)와 정인지 등이 지은 해례와 정인지 서(序)로 되어 있다. 그러다 1940년 7월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이 발견된 것이다.
지난 7월, 서울 종로2가 YMCA(한국기독교청년연합) 옆 골목길에서 승동교회 방향으로 있는 공평구역 도시환경사업부지에서 400년 전 조선 전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종-중종 때 제작된 물시계 주전, 세종 때 만들어진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 중종-선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총통 8점과 동종 1점 등이 발굴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6월에도 지표면에서 약 3m 아래에 있는 곳에서 깨진 항아리 안에서 훈민정음 창제 시기의 금속활자가 출토된 것이다. 사실 인사동은 서울의 전통 문화 예술 거리로 알려졌지만, 상전들의 장터나 민가의 창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점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실물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발견이다. 금속활자는 인류 문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런 금속활자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실물이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금속활자 발명을 이야기할 때 구텐베르크(Johannes Gensfleisch, 1398-1468)를 떠올리지만, 구텐베르크가 《42행 성경》을 인쇄한 것은 1455년이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된 금속활자들은 구텐베르크의 성경보다 앞서 제조된 활자이면서 활자 중 가장 뛰어난 1434년 갑인자이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경》은 한 페이지가 42행씩 두 줄로 되어 있는 라틴어 성서로 대략 180부가 인쇄됐고, 남아있는 인쇄도구와 활자는 구텐베르크 사후 약 100년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반해 이번에 출토된 금속활자는 인쇄도구인 활자와 인쇄물인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직지(直指)심체요절》만 하더라도 구텐베르크 《42행 성경》보다 78년 앞선 1377년에 인쇄된 것이라 완전체가 된 셈이다.
《42행 성경》 인쇄는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배워 제작했을 것”이라고 영국 셰필드대학 존 홉슨(John. Hobson) 교수는 《서구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에서 주장한다.
왜냐하면 세계 최초 목판 인쇄인 《무구정광대다라나경》이 통일신라시대인 706-751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특히 세종 때의 표기법이 반영된 활자들의 다량 출토는 한글의 역사에도 큰 의미가 있는 보물이라 할 수 있다. 모든 활자에서 이 동국정운식 표기법의 원칙들이 발견되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 후 한자음을 한글로 표기하는 방법을 담은 《동국정운》을 집필했는데, 그 표기법이 바로 동국정운식 표기법이다. 이 표기를 널리 쓰이게 하기 위해 금속활자로 인쇄 제작한 것이다. 이 정도면 세계 인쇄사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다. 이번에 발굴된 활자의 1,600여 자 중 600여 자가 한글 활자다.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과 발견은 동시에 인쇄기술에 대한 논증을 뒷받침할 자료이자 정말 귀중한 유물인만큼,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응원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한글’이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전파되었다. 조선 시대에 ‘암클’, ‘아랫글’이라 불리며 무시당한 훈민정음은 갑오개혁 때 비로소 공식적인 나라 글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렇지만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천대받고 있을 때, 기독교는 한글만으로 된 성경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파고들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한글’이 전파됐고, ‘한글’이 전파되는 곳에는 ‘기독교’가 전파되는 인과관계를 가져왔다.
해외 선교사들의 한글 접근과 이해는 인쇄 출판문화를 바꾸어 놓았다. 기독교 서지 측면에서 보면 천주교는 한자와 한글 성경과 자료를 대원군 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베르뉘(Berneux) 주교가 저술한 목활자본 《텬쥬셩교공과(1862)》, 다블뤼 안또니(Anthony) 신부는 순한글 필서체 목판본인 《셩찰긔략(1864)》과 《회죄직지(1864)》, 《신명초행(1864)》 등을 펴냈다. 연활자목판본 《성경직해(1892)》도 1740년 북경에서 간행된 《성경광익(聖經廣益)》을 한글본으로 인용 5년간에 걸쳐 9권으로 출판하였다.
개신교는 한글 보급을 위해 금속활자 인쇄법을 사용해 말본, 사전 등의 연구와 출판에 더 주력했다. 1880년대를 기점으로 신문·잡지의 편찬과 인쇄를 맡아보는 박문국(博文局)이 생기고, 최초의 민영출판사인 광인사(廣印社)가 설립됐다.
서양의 활판인쇄술과 접목해 한글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기술해 한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시기였고, 대중화·보편화하는 계기도 만들었다.
그런 사례는 프랑스 선교사 다레(Claude-Charles Dallet, 1829-1878)의 《조선교회사(1871)》와 파리 외방선교회가 출판한 역사상 최초의 《한불자전(1880)》, 그리고 만주에서 시작된 존 로스(John Ross, 1842-1915)의 《조선어 첫걸음(1877)》, 《예수성교전서(1887)》와 쪽복음, 일본에서 쓰여진 이수정의 《현토신약성경(1887)》 등으로 이어졌다.
또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Grant, 1859-1916)의 《한영문법(1890)》과 《한어자전(1890)》으로 이어졌고,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 선교사의 《한영사전(1897)》 등은 한글 체계화의 기초가 되고 한글 전파의 일익을 감당하였다.
그들의 한글 사용이 오늘날 한글민족과 문맹제로의 국가를 만드는데 기초가 되었다. 한말, 더군다나 구식교육 즉 한문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에 있던 서민대중이 새로운 진리인 기독교의 성경을 접하므로 심령의 구원을 얻는 기쁨과 더불어, 한글을 깨쳐 처음으로 글눈을 뜨고 지식과 개화의 거듭난 기쁨을 동시에 체험하니, 이는 세종대왕 한글 창제의 뜻이 실현된 것과 같았다.
한글은 드디어 1894년 갑오개혁 때 우리나라 공용어가 되었으니, ‘조선성교서회’가 설립된 1890년은 공식적으로 한자 시대였지만 시대를 앞서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한글은 성경과 찬송가뿐 아니라, 쪽 복음과 전도지 등에서도 기독교의 복음 전파에 필수적인 수단이 됐다.
기산 김준근(金俊根, 생몰년 미상)의 삽화와 함께 출판된 소설 《천로역정(1895)》 등 기독교 문학의 번역과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 선교사의 《조선그리스도인 회보(1897)》, 《예수교회보(1910)》 등 신문과 《신학월보(1900)》 등의 잡지, 1896년 한글전용 《독립신문(1896)》과 국한문 혼용 《황성신문(1898)》을 내며 빠르게 대중 속으로 파고들며 확장되었다.
초기 기독교의 모든 인쇄물도 대부분 한글만으로 된 것이었다. 당시 교회는 한글로 된 성경과 교과서 등 여러 한글 책자의 출판을 통하여 민족을 계몽하고 근대화를 여는데 크게 기여했다.
선교 초기 언더우드와 게일 선교사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은 한글의 과학적인 면과 우수성을 인식하고, 이를 해외에 알리려 노력한 원조다. 그들의 연구는 한글의 가치를 널리 세계에 번역 소개할 뿐 아니라 완고한 한학자들에게도 이를 긍정하게 만들었고, 일반 대중에게 이 글의 효용성과 편리성을 깨우치게 하였다.
이렇게 한글이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자리하게 되자, 한글에 대한 존중심과 한글을 지키려는 마음, 즉 애국혼까지 불어넣게 됐다.
한글은 우리 민족이 창조해낸 위대한 문자이며, 디지털 강국 대한민국의 미래이다. 시대가 발전하고 세대가 바뀌면 사회적인 흐름에 따라 언어는 자연스럽게 변화가 필요하다. 글로벌 시대인 지금 외래어 사용이 필요한 부분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한글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순우리말을 이해하고 익히는 노력 없이 무조건적인 외래어와 신조어가 남발되는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훈민정음 반포 575돌과 93주년 한글날을 지나며, 우리 언어의 뿌리를 돌아보면 어떨까. 과학적이고 쉽게 배울 수 있는 위대한 언어인 한글을 제2외국어 또는 모국어로 채택한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 이유는 청소년들이 한국 문화와 한국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K팝(Korea-Pop)’이라는 한류의 영향 아닐까.
한국 드라마의 인기로 인해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전 세계적으로 문맹률 1% 미만인 유일한 나라 한국. 한글의 가장 큰 특징은 언제 어디서나 같은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글의 특성 때문에 외국인들도 한글을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다. 아름다운 우리말 한글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 아름다운 한글의 매력에 더 빠져들 것을 기대한다.
이효상 원장
서지학자, 칼럼니스트, 근대문화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