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섬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개인의 신앙 이해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 준수’를, 사회복음주의자들은 ‘사회 정의 구현’으로 그것을 이해한다.
경건주의자들은 ‘개인의 경건을 도모하는 것’을, 신비주의자들은 ‘신인합일’ 같은 개인의 영성생활에 매진하는 것을 ‘하나님 섬김(serving God)’으로 이해한다.
유대교도들은(the Jewish) 그것을 율법 준수와 더불어 단일신 야훼(Yahweh)를 섬기고 삼위일체 신앙을 배격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예수님 당시 그들의 신앙 형태가 그랬다. “사람들(유대교도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요 16:2).”
회심 전 유대교도였던 사도 바울의 신앙(갈 1:14) 역시 반삼위일체적(Nontrinitarianism)이고 율법주의적(Legalism)이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6)”.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3-14)”.
그럼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섬김(serving God)’은 어떤 것인가? 사도 바울이 “내가 아들의 복음을 전하는 일로 충심으로 섬기는 하나님(NIV, 롬 1:9)”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그것은 ‘복음을 섬기는 것(serving gospel)’이다.
여러 서신서들에서 그가 자타를 불문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복음의 일군’이라고 천명한 데서도 그러한 그의 인식이 확인된다.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골 1:23)”,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를 보내노니(살전 3:2)”.
그럼 ‘복음을 섬긴다(serving gospel)’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속하려 죽으신 것(그리고 그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을 전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 평생 그리스도의 죽음(십자가)만 자랑하고 전한 것(고전 2:2, 갈 6:14)은 그의 ‘하나님 섬김’의 표출이었다.
물론 ‘하나님 섬김’엔 ‘예배, 봉헌, 교회 봉사, 기도’ 등 다양한 내용들이 있으며, 그것들을 모두 ‘복음 섬김(serving gospel)’이라는 한 범주(category, 範疇)안에 넣는 것은 무리라는 비판이 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복음과 직·간접으로 연결된 것을 알면, 그런 비판은 일축된다. 예컨대, ‘예배’는 복음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행 10:36)의 결과이고, ‘봉헌’은 복음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열매(눅 7:41-47)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교회 봉사(엡 4:12)’,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유 1:20)’ 역시 다 복음의 열매이다.
그 외에 ‘자신을 산 제사(living sacrifices)로 드리는(롬 12:1)’ 개인의 경건 역시 경건주의자들, 신비주의자들의 ‘금욕’이나 ‘신인합일’의 추구와는 다른,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는(그리스도의 죽음을 증거 하는, 고후 4:10)’ 전도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사도 바울이 ‘성도’을 일컬어,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는 자…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4-15)’라고 한 것 역시 ‘복음 전도자’로서의 성도의 위치를 말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구약적인 ‘제의(祭儀)와 율법 중심의 하나님 섬김’이 ‘복음 안에서의 하나님 섬김’으로 바뀐 것을 보여준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은 ‘하나님이 사람(성자) 되신 삼위일체’가 그 핵심이다. 사도 바울이 ‘아들의 복음 안에서 섬기는 하나님(롬 1:9)’이라고 한 것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복음’과 ‘삼위일체’는 동일시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며, ‘복음을 섬기는 것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것(롬 1:16)’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그들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전하기를 힘쓰는 것(딤후 4:2)’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단일신론자들(monarchianists)인 유대교도·이슬람교도들로부터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요인이기도 하다.
유대교·이슬람과 기독교의 오랜 적대관계는 이 ‘삼위일체 신관’ 때문이다(이슬람의 꾸란(Koran)은 ‘하나님이 그의 자녀를 둔다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극도의 불경죄로 그의 심판을 초래한다(코란 19장 88-91절)’고 가르친다).
하나님이 택자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신(롬 8:2) ‘복음의 사랑’ 역시 ‘삼위일체 사랑’이다. 성자는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갈 2:20), 성부는 ‘아들을 희생시키는 사랑’을(요 3:16, 롬 5:8), 성령은 ‘두 위(位)의 사랑의 화신(化身)’으로 성도에게 임재한다(롬 5:5).
끝으로 성도의 ‘복음 섬김’은 삼위일체와의 연루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도 말하고자 한다.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중생한 성도’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이 ‘복음 전도’이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말할 때,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한다(고전 2:13)”고 한 것은 ‘복음 전도’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루된 일이기에 오직 성령으로 해야 하며, ‘말의 지혜로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게 된다(고전 1:17)’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복음의 섬김’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하는 모든 일에 있어, 삼위일체 하나님과 분리된 채, 자력으로 하는 일은 없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리스도인(할례당)의 표지로 삼은 것도(빌 3:3) 같은 맥락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