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죄’와 ‘둘째 죄’
‘인간(불신자)의 죄’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담과 인류 후손이 범한 ‘첫 언약 아래서 범한 죄(이하 ‘첫 죄’, 히 9:15)’이다. 다른 하나는 그것의 결과로 생긴 ‘죄값 사망을 지불하지 않아 생긴 죄(이하 ‘둘째 죄’)’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첫 언약 아래에서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신(히 9:15)’ 죽음을 수납지 않아 ‘죄 값을 지불하지 못한 죄’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수납해 하나님께 ‘죄 값(롬 6:23)’을 지불했다면 그는 ‘첫 죄’를 용서받았고 나아가 그것으로 야기될 ‘둘째 죄’는 그에게서 발생되지 않는다. 비유컨대, 범죄자가 ‘벌금’을 물거나 ‘징역’을 살면 무죄 방면(無罪 放免)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첫 죄’가 없었다면 그리스도가 ‘죄 값을 지불해야 할 일(히 9:15)’도 없었을 터이고, 나아가 그것을 지불하지 못해 야기될 ‘둘째 죄’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될 때 둘의 구분이 무의미 해진다.)
이렇게 ‘첫 죄’가 뿌리이고, ‘둘째 죄’는 ‘첫 죄’의 결과물이지만 그것(둘째 죄)은 매우 독특하고 독자적인, ‘전혀 다른 차원의 죄’라는 점에서이다.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수납하지 않아 ‘죄값을 지불하지 못했다’는 점 외에 ‘그의 죽음을 욕되게 했다’는 점에서이다.
흔히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예수를 안 믿어서’라고 하는 말은, 그것이 죄인을 구속하려고 흘린 ‘하나님 아들의 피’를 욕되게 한 점을 들어서이다. 성경도 그 죄를 모세의 율법을 폐한 것과는 비할 수 없이 ‘큰 죄’로 천명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8-29).”
그러나 이러한 ‘아들의 희생의 엄중함’에 대한 강조는 단지 그것의 강조로만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하나님 아들의 희생으로만 구속될 만큼 “‘첫 죄’가 엄중했다”는 논증을 성립시킨다.
꼭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에만 비용을 지불한다’는 ‘등가성 원리(equivalence principle)’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귀중한 ‘하나님 아들의 피’가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것을 위해 흘려졌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얼마나 심대히 침범했으며, 또한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절실했는가를 알면, ‘하나님 아들의 희생의 불가피성’은 인정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첫 죄’ 때문이라 해도 맞고, 불신앙으로 아들의 죽음을 ‘죄 값’으로 지불하지 않은 ‘둘째 죄’ 때문이라 해도 맞고,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수납하지 않아’ 그의 피를 부정하게 한 때문’이라 해도 맞다. 셋은 함께 어우러져 서로를 부연(敷演)하며 논리적인 결속을 이룬다.
◈첫째 사망, 둘째 사망, 그리고 구원
이처럼 ‘죄’가 다양한 의미를 갖듯, ‘그것의 대가(代價)로서의 사망’도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먼저 ‘첫 죄’, 곧 ‘첫 언약 아래에서 범한 아담의 원죄’에 참여한 모든 인류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임한 ‘첫째 죽음(창 2:17)’이 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고전 15:21-22)”.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죄 삯’으로 지불하지 않아 직면한 ‘둘째 죽음(계 20:14)’이 있다. 이것은 ‘첫 언약을 범한 대가로서의 죽음’인 동시에 ‘아들의 피를 욕되게 한 대가로서의 죽음’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그 외에 ‘첫 죄’로 죽은 상태로 있는(Abandoned in Death) ‘유기된 죽음(abandoned death)’이 있다. 이는 ‘첫째 죽음’과 ‘둘째 죽음’ 사이에 걸쳐 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롬 1:28).”
그것은 ‘새로운 죽음의 부과(賦課)’가 아닌, ‘첫 죄로 인한 죽음 상태의 계속’이다. 그리고 이 ‘죽음 상태의 계속’은 금생에서 그대로 유지되다가, 끝내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죽을 때 ‘둘째 사망’에 떨어진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죄’와 ‘사망’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구원’개념 역시 다중적 의미를 갖는다.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을 수납해 ‘죄 값 사망’을 지불함으로서 얻는 구원, 곧 ‘둘째 사망에서의 구원’이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또 이것은 ‘첫 죄’로 죽어있던 자들을 그대로 유기(遺棄)하지 않고 그것(죽음)에서 일으키시는 구원이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여기에 부득불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등장한다. ‘전자’는 죄로 죽은 인류 중 얼마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림을 받는 것’이고, ‘후자’는 죄로 죽어있는 자들이 그대로 방기(放棄)되는 것이다.
이는 ‘구원’이 전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존됐음을 말해주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해 아무 할 말이 없게 하고 오직 감읍함으로 받게 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