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마블 새 시리즈 <이터널스> (2)
윤리적 진지함을 향한 마블 스튜디오의 행보
환상적 속성과 작품성, 아직 어우러지지 못해
영적·실존적 현실, 실재적인 방식으로 관통?
성경 수준 실존적·윤리적 영향력 갖긴 힘들어
◈마블의 작품성: 작품성 확보에 도전하는 마블 스튜디오의 행보
마블 코믹스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가상과 흥미 위주로 전개된다. 이는 히어로 코믹스라는 콘텐츠 형식의 본성이자 한계이다. 간간이 윤리적 메시지를 집어넣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서사의 핵심이 될 수는 없고, 히어로들의 활극에 대한 상상력이 항상 주를 이룬다.
현재 디즈니의 자회사 마블 스튜디오의 고민은 디즈니가 고집하는 다양성 이념, 정치적 올바름(PC) 사상을 어떻게 히어로 영화 속에 조화롭게 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윤리적 메시지를 강화하면 서사가 밋밋해진다. 왜냐하면 윤리란 냉혹하고 재미없는 현실에 기반을 두고 고민해야 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영화적 상상이 과하게 반영되면 될수록 윤리적 설득력이 약화된다. 이는 현재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직면한 딜레마이다.
DC 엔터테인먼트는 나름 이 어려운 문제를 잘 풀어낸 경험이 있다. <다크 나이트> 3부작(2005-2012)과 <왓치맨>(2009), 그리고 <조커>(2019)를 통해 히어로와 윤리라는 주제를 적절하게 엮어냈고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물론 이를 위해 세 작품 모두 히어로의 활약과 관련된 영화적 상상을 상당한 수준으로 억제해야 했다.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사용하는 장치들은 어느 정도 과학적 근거가 있고, <왓치맨>의 히어로들은 닥터 맨하탄을 제외하면 다들 일반인보다 조금 더 많이 강한, ‘캡틴 아메리카’ 수준의 제한된 힘을 갖고 있으며, <조커>는 아예 일반인의 현실 안에서 서사를 풀어나간다.
마블 엔터테인먼트 입장에서는 이 점이 부러웠을 것이다. 히어로 영화에 현실성과 철학, 윤리를 성공적으로 담은 작품은 마블 쪽에서는 아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작품성을 크게 인정받은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아이언맨 1>(2008)이나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져>(2014)의 서사가 호평을 받지만, 그 역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작품들 중에서 비교적 괜찮다는 것이지, <다크 나이트> 3부작이나 <왓치맨>, <조커> 수준에 비할 바는 아니다.
마블 스튜디오의 사장 케빈 파이기가 <이터널스>의 감독으로 세미 다큐멘터리 제작에 능한 클로이 자오를 기용하고 영화 연출과 관련된 전권을 부여한 데는 마블 측의 작품성에 대한 갈망이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클로이 자오 스타일의 히어로 영화는 어설픈 현실성 때문에 히어로 액션의 화려함이 죽어버렸고, 빠른 호흡으로 진행되어야 할 서사를 느리게 진행하는 바람에 히어로 영화 특유의 긴박감을 주지 못했다.
주제의식인 생명의 순환고리와 그 속에서 희생되는 이들에 대한 고민도 밋밋한 연출과 서사 때문에 오히려 은폐되고 퇴색되는 느낌이다.
그러면 마블 영화의 환상적 속성과 작품성은 서로 성공적으로 어우러지기 어려운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단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마블 코믹스는 파산 직전에 이른 기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대중적 인기 회복에 전념해야 했고, 마블 영화는 이 목적에 맞는 연출방식과 서사를 채택했을 뿐이다.
그리고 현재는 그 목표를 달성했고, 이제서야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작품성이라는 목표를 돌아보기 시작한 듯하다.
◈마블의 윤리: 현실에 대한 윤리적 영향력 강화를 시도하는 마블 스튜디오
히어로 작품 속에 현실성과 윤리적 메시지를 강화해 반영하려는 마블 스튜디오의 노력은 이제 막 제대로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터널스>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그러나 마블 스튜디오의 강점은 이전에 인기없이 묻혀버린 작품의 서사와 캐릭터를 다음 영화에서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이터널스>의 시도가 좋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해서, 마블 스튜디오 측의 작품성 확보 열망이 식지는 않을 듯하다. 이렇게 한두 작품 실패하다가, 종국에는 기존의 실패 경험들을 바탕삼아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DC 수준을 넘어 <아이, 로봇>(2004)이나 <컨택트>(2016) 같은 수작 SF 영화 수준의 작품성과 윤리적 무게감을 갖추게 된다면 대중문화 영역 안에서 마블 콘텐츠의 영향력은 당연히 한 단계 더 커질 것이다. 그리고 이는 대중문화계 내부에 환상과 신화를 추종하는 추세를 더 강화시킬 것이다.
<이터널스>를 통한 마블 스튜디오의 시도는 야심차다. 상당한 자본을 들였지만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을 만들어도 나중에 회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뒷받침되어 있다.
그리고 이제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인간 실존의 현실적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 또한 은근하게 내비치고 있다. <이터널스>는 관객과 평단의 호응을 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다음 번에도 또 실패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런 실험적 시도가 이어지며 결국 어느 순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조커> 이상의 작품성을 지닌 수작이 나온다면, 그동안 마블 세계관을 얼기설기 엮어왔던 허술한 신화와 과학의 조합들이 강렬한 현실성을 가진 것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킬 것이다.
영화 팬으로서는 반가운 일이겠지만, 기독교인 관객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은 일이다.
그 동안 마블 작품들은 유쾌하고 흥미진진하지만 주제의식 측면에서는 경박하고 허구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마블 스튜디오가 작품성과 주제의식 측면에서 호평을 받는 작품들을 연이어 쏟아내게 되는 상황이 도래하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콘텐츠 브랜드에 대한 기본 인식이 달라질 것이다. 허술한 신화적 환상의 군집체가 현실적인 윤리 메시지의 전달 통로로 달리 인식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예술의 윤리적 기능을 강화시키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허구는 그 허구의 정도가 과하다.
현상학자 레비나스는 예술의 허구적 아름다움과 그것이 주는 감성적 쾌감은 결국에는 무한한 신에 의해 주어지는 윤리계명을 감지함으로써 부정되어야 한다고 가르친 바 있다.
그래야 그 예술 작품에 담긴 윤리적 메시지와 의미가 우리의 삶의 현실과 연결되며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블 스튜디오는 온갖 신화적, 과학적 설정들로 구성된 잡다하고 조잡한 허구적 세계관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마블 영화의 윤리적 영향력을 강화하려 한다.
이런 시도는 결국 환상과 허구 속에서의 윤리를 가르칠 뿐, 우리 현실에 이어지는 참된 윤리적 각성을 일으킬 수 없다.
혹 유비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 의해 고안된 유비 수준의 윤리적 가르침은 우리 삶의 현실에서 실제적인 윤리 실천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타인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어떤 윤리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 그 누구도 마블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윤리적 결단은 한 사람을 철저히 날 것 그대로의 현실 안으로 내던져놓기 때문이다.
<이터널스>를 통한 마블 스튜디오의 작품성 강화 시도는 대중문화 업계 내부적으로는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사회와 삶의 현실에 진정한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다.
이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세계관의 태생적 한계이다. 결국 마블의 시도는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강화할 뿐, 삶의 현실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다.
단적으로 말해서 마블 신화는 성경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없다. 인간의 영적 현실과 실존적 현실을 지극히 실재적인 방식으로 관통하는 성경 수준의 실존적, 윤리적 영향력을 마블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마블 스튜디오는 성경이 점유하고 있는 윤리적 영향력을 대중문화를 통해 잠식하려 노력 중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