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열 처녀(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 비유(마 25:1-13)
(1) 하나님 나라는 등(燈)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예수는 열 처녀의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교훈한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기름을 ...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13).
본 비유는 “그 때에”라는 부사로 시작되는 “그 때는” 바로 앞 이야기에 나오는 종말의 때를 가리킨다. 이 비유는 천국이 열 처녀와 “같을 것이라(όμοιωθήσεσαι)고 소개하는데 이 동사가 현재형이 아닌 미래형으로 쓰이고 있다. 그것은 비유의 내용이 예수가 말하는 시점에서는 미래의 일이기 때문이다. ”처녀“(παρθένος)는 결혼하지 않는 여성 혹은 남성과 성관계를 가져보지 않은 여성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결혼 축제에 참여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신부의 도우미 내지 절친한 친구들을 지칭한다.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의 풍습에 의하면 결혼식에 앞서 약 일 년 전 약(정)혼식이 있었다. 신랑은 장인 장모에게 신부를 위해 결혼 지참금을 지불하고 결혼 약정서에 서명하고 난 후, 단장하고 기다리고 있는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무도회를 연다.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가서 저녁 무릎 혼인예식을 거행하는데 예식 중에는 축하의 의미로 횃불을 사용하였다. 이 비유는 신부의 거주지와 신부의 집에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때 신부 집에서는 열 처녀로 구성된 도우미 처녀들(신부 또래의 절친한 친구들)은 신부가 신랑집으로 가는 결혼 행렬에 참가하는 것이 관례였다. 결혼 행렬에 참여하려면 각자의 횃불이 필요했다. 횃불에는 막대기에 솜(헝겊이나 천)에 감람유를 묻혀서 불을 밝혔다. 감람유는 15분마다 다시 공급되어야 했다. 신랑집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가하려면 감람유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했다.
열 처녀(the ten Maidens) 비유는 하나님 나라 혼인 잔치에 신랑은 예수요, 신부는 신자들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신랑이 와야 혼인잔치는 거행되는데 신랑이 더디 온다. 인자의 오시는 시점이 지연되더라도 신랑 예수의 신부인 교회와 신자들은 인자를 맞을 준비 태세를 갖추라는 교훈을 하고 있다. “그 날과 그 시”(마 25:13)는 인자가 오시는 시각을 말하고 있다.
(2)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 항상 깨어 있는 삶과 게으르고 나태한 삶.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유한다. 다섯은 슬기운 처녀요 다섯은 미련한 처녀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 갔으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였다. 신랑이 더디 옴으로 처녀들이 다 졸며 잔다. 밤 중에 신랑이 온다.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러 나간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의 등은 기름이 부족하여 등이 꺼져 가니 슬기로운 자들에게 너희 기름을 나눠달라고 청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우리들이 함께 사용하기에 부족하니 파는 자들에게 기름을 사라한다. 이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와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이 닫힌다. 미련한 처녀들이 나중에 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나 신랑이 대답한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미련한 처녀들은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 예수는 가르치신다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 비유에서 강조되는 한 측면은 신랑 도래의 지연이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이 지연의 기간 동안 잠을 잔 자들 가운데는 어리석은 자들 뿐 아니라 지혜로운 자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두 졸다가 잠을 깼다”(5하절). 준비성이란 끊임없이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언제 주님이 오시든지 간에 그분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오히려 안전하고 편한 잠을 잘 수도 있다.
신자 중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주님의 오심을 등과 충분한 기름으로 준비하는 슬기로운 자들로, 다른 부류는 주님을 기다리고 등은 있으나 기름 준비가 부족한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 슬기로운 자들은 기름을 충분해서 혼인 잔치에 참가할 수 있으나, 어리석은 자들은 기름이 부족하거나 없어 혼인잔치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당할 수 있다. 신자들은 항상 경성하고 깨어 있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 가운데(살전 5:16-18a), 말씀 묵상과 성령의 기름부어시는 교통 속에서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비유는 신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예기치 않은 임박한 도래(parusia)에 대한 준비를 각성시키고 있다.
밤 중에 모두가 자고 있을 때 신랑이 갑자가 도착하자 지혜로운 자들이 “우리 등이 꺼져 가니 기름을 나눠 달라”는 어리석은 자들의 요청에 대하여 “우리와 당신들을 위해 충분하지 못하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사라”고 거절하는 것은 매정스러운 태도라기보다는 “마지막 때를 위한 준비성이란 스스로 책임져야할 사항이지 다른 사람의 준비성에 의존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는 슬기로운 자들의 이기적 태도라기보다는 각 신자 개인이 갖추어야할 개별적 책임의 철저성으로 보아야 한다. 문이 닫히고 난 후 어리석은 자들이 나중에 기름을 가지고 문을 열어달라 하나 신랑의 대답은 단호하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이는 종말론적 심판의 엄격성을 말한다.
(3) 경성하여 깨어 있으라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들은 신랑이 왔을 때 바로 혼인 잔치에 들어간다: “신랑이 와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고”(마 25:10). 혼인 예식장의 문이 닫힌다. 기름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혼인 예식장의 문이 닫히고 난 후에 들어가려고 문을 열어 달라고 한다. 그러나 신랑은 나중에 온 다섯 처녀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 25:12b). 예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 도래의 종말론적 임박성과 준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항상 경성하여 깨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주님을 기다리되 등(燈)을 밝히는 기름(ἕλαιον)이 준비되어야 한다. 구약 성경에서 기름이라고 하면 감람(Oliver) 기름을 말한다. 감람 기름은 살림살이에도 쓰고 약품과 화장품으로도 썼다. 또한 감람 기름을 향료와 섞은 뒤에 임금 같은 높은 지위 사람들이나 특별한 물건들에 기름 붓는 데 썼다. 기름은 기쁨과 잔치를 상징한다. 영적인 의미에서 기름이란 성령을 말한다. “기름을 담아”(마 25:4)란 성령으로 항상 하나님과의 교통이 충만함을 말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야(요 3: 5)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나 주님의 빛을 보게된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꺼저 어두어진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형상의 등을 밝히신다(마 25:4). 이 영혼의 등(燈)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교통하고 주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오시는 신랑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해서 적으로 믿음, 소망, 사랑의 덕성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기름이란 “종말을 준비하는 깨어있는 마음의 상태,” “ 하나님 나라에서의 자신의 본분에 합당한 행동을 행함”을 말한다. 그리고 “지혜로운 자,” “기름을 준비한 자,” “깨어 있는 자” 등 단어는 이 비유의 핵심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람이란 메시아 재림를 기다리면서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을 사는 자들(살전 5:1-11)을 말한다. 결혼 축하연은 “준비된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비유의 핵심이다.
2017년 5월 한국에 초청받아 양재 온누리교회 성전에서 ‘하나님 열망 콘퍼런스’(Desiring God Conference)에 설교를 한 적이 있는 미국 미네소타주 소재 베들레헴 침례교회 담임목사 파이퍼 목사는 18세기 미국 대각성운동의 주역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을 계승한 목회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독일의 뮌헨대에서 판넨베르그 교수에게서 신학박사를 받았으며, 침례교 목사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칼빈주의 신학을 표방한다. 온누리교회가 한국교회를 위해 파이퍼 목사를 초청했는데 5월 29∼30일 서울 서초구 온누리교회(이재훈 담임목사) 양재성전에서 열린 ‘디자이어링갓 콘퍼런스’(Desiring God Conference)에는 목회자와 신학생만 3000여명이 모이는 등 폭발적 반응을 보였다(존 파이퍼 목사 “교회 위기는 하나님과의 사랑이 약해진 때문,” ‘美 복음주의 대표적 지도자’ 존 파이퍼 목사 첫 방한, 국민일보 입력 : 2017-05-31 00:00/수정 : 2017-05-31 11:05)
존 파이퍼(John Piper)는 ‘열 처녀의 비유’를 들어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고, 아직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시급히 전도해야 한다“면서 “무엇보다 마지막 때를 위해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파이퍼에 의하면 “이 비유는 마지막 날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준비에 관해 말하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살아 있는 신앙을 갖지 못할 경우, 등(燈)은 그 신앙이 껍데기일 뿐임을 드러내듯이 기름은 참된 영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묻는다: “당신은 준비되어 있는가? 당신은 종교라는 형식 안에 기름을 담고 있는가? 당신은 생명, 믿음, 소망, 사랑이 있는가? 아니면 형식적인 작은 등만을 들고 다니는가?” 또 “‘나는 교회에 간다. 나는 성경을 들고 다닌다. 나는 식전에 기도한다. 나는 10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런 것들이 당신이 들고 다니는 작은 등과 같은 것”이다. 파이퍼는 “이 처녀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릴 때 등에 기름이 모자라지 않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처럼, 오늘날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믿음이 늘 살아 있게 유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등에 있는 기름은 처녀들의 일이 잘되도록 돕는 수단들 중의 일부다. 만일 처녀들이 등에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면, 이는 자신의 사명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등으로 빛나게 되어 있다. 다섯 처녀는 미련하다. 빛을 비추라는 소명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이퍼의 이러한 열처녀 비유 해설 설교는 예수 비유를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하여 그 종말론적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 나라 혼인예식은 예수가 이 세상이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아니한 까닭을 묻는 것에 대하여 다음같이 대답하신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마 9:15a).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요 신랑이신 예수와 함께 있는 데 기뻐할 시간에 금식할 수 없다. 복음은 금식(禁食)과 금욕(禁慾)의 생활을 가르치지 않는다. 복음은 신랑 예수와 혼인하고 그와 연합을 즐기는 영적 연합의 삶을 가르친다. 파이퍼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만족함을 얻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들에게 임한다’는 슬로건으로 요약되는 기독교 희락주의(Christian hedonism)을 제언한다. 그의 제언은 예수의 가르침에 상응하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1번 문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의 문맥에 상통한다.
단지 신랑이 멀리 계신다고 생각할 때는 신랑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금식할 수 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b). 예수는 금식도 하나의 축제처럼 행할 경우에만 진실한 것이다. 자신의 경건성을 과시하려고 하는 금식은 참된 금식이 아니고 종교적 외식이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9:16). 예수는 금식의 태도란 축제할 때 처럼 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 6:17). 금식은 기도와 관련하여 행해진다(막 9:29; 마 17:21). 금식이란 사람들에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소원을 고하는 것이다: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8). 이렇게 금식하는 자의 소원을 하나님은 은밀히 갚아주신다.(계속)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