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위엔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을 심층적으로 들여다 보면, 그들의 말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사람에 따라 ‘믿음의 목적’도 ‘동기’도, ‘내용’도 다 제각각이다.
계시에 근거한 참된 ‘성령의 신앙’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생각이나 필요에 의해 건축된 ‘인위적 신앙’도 많다. 후자는 무능할 뿐더러 지속성도 없다. 자기의 필요를 충족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어느 순간 사그라지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 기원적인 ‘성령의 신앙(갈 5:5)’은 소멸되지 않는다. 이는 그것의 원천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 기원적 신앙은 어떤 악조건, 고난, 시험, 실패에도 무너지지 않는 불굴의 ‘견인력(the power of perseverance, 堅忍力)’을 가진다.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이다.
◈구원 경륜에 속한 믿음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 안에 속해 있다. 하나님이 죄인을 (죄에서)구원하는 경륜으로 ‘믿음’을 제정하셨다는 말이다. 만일 하나님의 ‘구원 경륜(the administration of salvation)’이 없었다면 ‘믿음의 경륜(the administration of faith)’도 없었다.
사도들이 “믿음의 결국(the goal of faith)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느니라(엡 2:8)”고 설파한 것은 ‘믿음의 목적’이 구원에 있음을 진술한 것이다.
구원을 지향하지 않는 믿음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자연인의 본성에서 나온 무병장수와 부와 성공을 목적으로 삼는 구복(求福) 신앙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이는 기독교 신앙의 구복성을 일체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무엇보다 죄인에게 주시려고 한 것이 '죄에서의 구원'이라는 말이다).
물론 죄인이 처음부터 구원을 목적으로 신앙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영적으로 죽었기에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죄인이며 자기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대부분 처음에는 다양한 동기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설교자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참 신앙에 이른다.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오래 교회를 다니며 숱하게 복음을 들어도 여전히 처음 가졌던 기복적(祈福的)인 자연 신앙에 머문다. 신학적으로, 이들은 ‘유효적 소명(effectual calling)’을 받지 못한 ‘일반적 소명(general calling)’만을 받은 자들이다(마 22:14).
◈믿음의 의로 말미암는 구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같은 ‘고등종교’는 대개 ‘구원’을 지향한다. 물론 이단이나 유사 기독교도 다 그러하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구원지향적인 신앙을 가졌다고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의(義)’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데, 그들의 믿음이 그것을 산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의로 말미암는 구원’은 하나님의 공의의 발로이고, 기독교 구원의 독특성이기도 하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의(義)’가 없는 죄인을 구원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택자를 구원하실 때 먼저 그에게 ‘의(義)’를 주신 후 구원하신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시 24:5)”,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그리고 그 의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율법적인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義)’, 곧 ‘신적인 의(Divine Righteousness)’이다. 인간은 그것을 만들 수도 흉내낼 수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의를 내세우므로 의에 이르지 못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반면 ‘행위의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의롭다 함을 받았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롬 9:30-31).”
그리고 그 ‘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다. 유대교도였을 때, 자타가 ‘율법에 흠이 없는 자(빌 3:6)’로 정평이 났던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자신의 의(義)는 오직 ‘믿음의 의(義)’라고 천명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갈 3:9).”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믿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진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남자나 여자, 문명인이나 야만인, 종이나 자유자를 불문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믿음
‘의(義)’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듯, 그 의를 입게 하는 ‘믿음’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 예수님이 “주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하신 것은 그의 ‘믿음’의 출처가 하나님이심을 말씀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엡 2:8)’이라 한 것이나,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느니라(고전 2:9-10)”고 한 말씀 역시 ‘믿음의 출처’를 밝힌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믿음’을 어떻게 우리에게 넣어주시는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마음에 ‘훅’ 하고 불어 넣어주시는가? 아니다. 그것은 복음을 매개로 한다. 복음이 선포될 때 성령이 청중에게 역사하여 믿어지게 하신다.
사도 바울이 ‘믿음’과 ‘복음’과 ‘전도’를 연결 지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7, 14).”
하나님은 택자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에로 부르시고(살후 2:14), 택자는 그 ‘복음의 부르심’에 ‘성령으로의 믿음’으로 응답하고, 그 결과 구원에 이른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