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찾아서 16] 바울과 가이사랴 (3)
페니키아인 거주지로 시작해 헤롯 왕이 인공 항구 조성
로마 총독 주재지, 빌라도, 벨릭스와 베스도 총독 주재
4세기 말 비잔티움 시대 기독교 문화 기반해 크게 번영
십자군과 이슬람군 번갈아 점령, 당시 부두 잔해 바다에
바울이 2년 동안 구류되어 있었던 가이사랴는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대 유적지를 갖고 있다.
가이사랴 유적을 육지에서 보면 푸른 지중해를 배경으로 아치형 문, 건물 기둥, 바닷가에 서 있는 성벽과 건물벽 등 이곳에 있던 도시가 범상치 않았다는 것을 한 번에 말해주고 있다.
가이사랴는 고대에 페니키아인들의 거주지로 시작되었다. 당시 해양 민족으로서 항해술이 뛰어난 페니키아인들은 이 항구도 이용하여 지중해 교역을 장악하였다.
그 후, 기원전 22-10년 사이에 유대의 헤롯 왕이 그의 후원자이고 상관인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가이사랴 해안에 항구를 만들고, 사치스런 도시로 꾸며서 로마제국의 황제를 뜻하는 가이사(Caeser)를 기념하여 ‘가이사랴’라고 이름 붙였다.
가이사랴는 천연의 항구 조건이 없는 해안에, 헤롯이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투입하여 부두를 만든 인공 항구이다. 당시에는 가이사랴에 로마인, 사마리아인, 유대인 등이 함께 거주하였으며, 사마리아인괴 유대인은 로마인을 섬기는 위치에 있었다.
서기 6년부터는 유대 속주(屬州)를 다스리는 로마 총독이 주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재판한 본디오 빌라도 총독도 이곳에 주재하였고 바울을 심문한 벨릭스 총독이나 베스도 총독도 이곳에 주재하였다.
피지배 민족인 유대인은 서기 66년에 이곳에서 로마에 대해 항쟁을 하다가 약 2만 명이 학살되었다. 사도 바울은 그때 로마에 있었으므로 개인적으로 화(禍)를 피할 수 있었다. 그 후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자 가이사랴는 로마제국 유대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로마는 가이사랴를 유대 속주의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어 서기 3세기 가이사랴는 그리스의 아테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레바논의 베이루트와 함께 로마법을 공부하여 관리가 되려는 학생들이 모여드는 도시가 되었다.
서기 4세기 말에 로마 제국의 국력이 쇠퇴하면서 비잔티움(동로마 제국) 시대가 시작하자, 가이사랴는 기독교 문화를 기반으로써 크게 번영하였다.
그러나 서기 639년에 이슬람 군대에 점령당하였고 1101년에 십자군이 탈환하였다. 1187년에 가이사랴가 다시 이슬람에 점령되었을 때 이슬람 군대는 가이사랴 도시와 성벽을 파괴하였다.
그 후 십자군과 이슬람군이 다시 가이사랴를 점령하였다. 한편 시간이 가면서 가이사랴 항구에 건설해 놓은 부두와 로마인들이 만든 각종 시설은 바닷물에 침식되어 부서지거나 모래에 덮여 버렸다.
오늘날 가이사랴 해안에는 당시의 부두 잔해가 물 속에 잠겨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이사랴에는 로마 시대에 만든 부두, 야외 반원형 극장(2천명 수용가능), 전차 경기장, 수도교(水道橋), 신전, 광장, 시장, 예술인 주거지, 일반 주민 주거지 등과 십자군 시대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유적 가운데 많은 부분이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는 발굴 작업에 의해 발견된 것이고 발굴 작업은 현재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울이 2년 동안 구류되어 있었던 곳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가이사랴는 푸른 지중해에 맞닿아 있고, 뒤로는 사론 들판이 펼쳐져 있다. 이런 좋은 자연 환경을 가진 곳은 이스라엘에서는 보기 드물다.
그러므로 가이사랴 해안(해안 유적지와 로마 시대 수도교 사이)에는 오늘날 부유한 이스라엘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권주혁 박사
‘권박사 지구촌 TV’ 유튜브 운영
저서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찾아서>, <여기가 이스라엘이다> 등
성지 연구가, 국제 정치학 박사
세계 136개국 방문
영국 왕실 대영제국 훈장(OBE) 수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