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2)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얼기설기 잇는 멀티버스 이론
영화에서 멀티버스 연결하고 조작하는 주된 방편, 주술
새로 등장하는 히어로, 빌런과 그들 능력 참신하지 않아
경제적 이익 추구한 가짜 초월 서사, 슈퍼히어로 콘텐츠
◈초월과 종교: 초월을 묘사하지만 종교와는 무관한 슈퍼히어로 서사
최초의 현대적 슈퍼히어로 콘텐츠는 1936년 처음 발표된 ‘팬텀’ 시리즈이다. 당시는 단독 코믹북이 아니라 신문지상에 연재되는 만화였다.
그리고 2년 뒤, 20세기형 슈퍼히어로 캐릭터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슈퍼맨’이 등장했다. 이 시기는 미국이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대공황의 여파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가운데 유럽에서 대규모 전쟁 조짐이 목격되던 흉흉한 시절이었다.
이 시기 이전까지 서구 사람들은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대규모의 불안과 고통이 닥치면 먼저 교회를 찾았다.
미국은 유럽보다 신앙에 의존하는 정도가 더 높았다. 사회적 격변으로 불안과 고통, 소외가 만연할 때마다 전국적 부흥운동이 일어나 신앙의 정신을 되새기고 현실의 고난과 고통을 극복해나갈 힘을 얻었다. 19세기까지 일어난 세 차례의 대각성 운동은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에 힘입고 있었다.
그런데 1930년대 대공황 당시 미국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시기에는 교회의 역할이 이전보다 크게 축소됐다. ‘광란의 20년대(Roaring 20s)’라 불리던 시기를 거쳤기 때문이다.
이 시기 미국의 청년 세대 가운데 상당수는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보다 훨씬 앞서 세속화가 진행된 유럽, 특히 프랑스 문화를 접하고 거기에 깊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물질에 대한 탐욕에 휘둘려 신앙과 윤리에 대한 고찰을 외면해 버렸던 1920년대 호황기를 경험했다.
한 마디로 1910년대와 1920년대를 거쳐 미국 사회에 신앙의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청년세대가 양산됐고, 이들이 대공황 당시 미국 경제활동의 주역인 30-40대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미국 사회 세속화의 시대 흐름을 빠르게 읽어낸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슈퍼히어로 콘텐츠였다. 사회의 격변과 경제적 침체, 그에 따른 사람들의 생활고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공략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는 가상의 초자연적 캐릭터를 창안해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초자연성에 근거를 부여하기 위해 기독교적 요소를 비롯해 온갖 신화와 전설, 그리고 오컬티즘을 차용했다.
결국 이들 작가, 만화가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이들이 만든 콘텐츠는 초월의 새로운 표상을 제시해서 현실의 고달픔에 지친 사람들에게 잠깐이나마 위로를 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것은 원래 교회가 담당하던 일이었는데, 유치한 것으로만 취급받던 하위문화 장르에 역할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슈퍼히어로 콘텐츠는 기독교 신앙, 신화, 주술, 미신, 전설 등 온갖 종교적 요소를 차용하고 있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사람들을 종교적 믿음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는 그 궁극적 목적이 초월에 대한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값싼 위로와 흥미 충족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는 데 있기 때문이다.
◈초월과 환상: 참신성의 한계에 이른 마블 스튜디오의 환상적 신화
이번에 개봉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코로나 확산세가 심각한 가운데서도 흥행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 4 작품들의 흥행 부진을 단번에 털어내는 듯하다. 관객과 평단의 평가도 대부분 호평 일색이다.
그런데 이번 <스파이더맨> 신작이 호평을 받는 주된 이유는 기존 소니 픽쳐스 단독 제작 <스파이더맨> 시리즈(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부작) 요소들을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끌어왔다는 것이다.
토비 맥과이어, 앤드루 가필드가 연기하는 기존의 두 스파이더맨이 함께 출연하는 데다, 해당 시리즈에 등장했던 모든 빌런들까지 차례대로 등장한다. 이는 기존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관람했던 관객들에게 커다란 반가움을 느끼게 해준다.
결국 이번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최대 흥행 요인은 기존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기억하는 관객들의 추억에 호소하는 추억팔이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굳이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지금까지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로 이어졌던 소니와 마블의 합작 스파이더맨 시리즈 서사 분위기를 좀 더 무겁고 진중한 국면으로 끌고 간다는 점도 있다.
마블 작품을 오래 접한 팬들일수록 마블 작품에서 가벼운 활극보다는, 좀 더 복잡하고 진중한 서사를 찾기 원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 <스파이더맨> 영화는 그런 요구를 충족시켜준다.
어쨌든 이런 ‘추억팔이’를 가능하게 해준 영화 속 설정은 당연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작품들을 얼기설기 이어주는 멀티버스 이론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이 멀티버스를 연결하고 조작하는 주된 방편은 주술이다.
결국 주술이라는 설정에 깃든 추억팔이가 이번 <스파이더맨> 신작의 주된 흥행 전략이고, 그 외 서사의 참신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현재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봉착한 서사상의 한계를 보여준다. 기존 서사들을 획기적으로 압도할만한 참신한 요소나 캐릭터를 창작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새로 등장하는 히어로, 빌런, 그리고 그들의 능력이 앞으로의 서사를 이끌어갈 핵심 능력인데 이 부문에서 참신함을 찾아보기 어렵다.
신화나 전설처럼 초월을 다루는 환상 서사들은 참신성을 잃으면 곧 그 생명력을 잃게 된다.
반복적으로 경험되는 인과적 현상들의 궤를 능가하는 초월적 체험을 다루어야 한다. 기존의 인과성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능가하는 서사가 계속 창안되어야 한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일종의 현대적 신화 혹은 전설이라고 본다면, 소니 픽쳐스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그동안 이 캐릭터를 중심으로 구축해온 설정, 배경, 캐릭터 등은 그 내적 인과성을 이룬다.
이번 <스파이더맨>의 신작 서사는 거의 대부분 기존에 구축된 인과성 안에 머무르고 있다.
새로운 점이라면 단지 닥터 스트레인지가 새로운 망각의 주술을 시도한다는 것뿐이다. 멀티버스 간 이동이라는 요소도 <닥터 스트레인지>나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이미 소개된 바 있는 것이다.
따라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는 기존의 설정과 질서를 능가하는 초월의 요소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초월 요소가 인간의 종교적 감각을 일깨우는 필수 계기인데, 최근 마블 작품들은 주술이나 신화 같은 종교적 요소들을 차용하면서도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초월적 요소는 배제하고 있다.
이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슈퍼히어로 콘텐츠의 근본 목적이 초월에 대한 진지한 고찰에 있지 않고 흥미유발을 통한 경제적 이익 획득에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피니티 사가, 즉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3까지의 마블 스튜디오는 지금처럼 흥행 위주의 어설프고 구태의연한 서사를 선보이지는 않았다.
이전까지 마블 영화 캐릭터들은 칸트적 의미에서의 도덕적 초월, 그리고 기술문명이 주는 힘이나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힘에 인간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는 초월에의 고찰 노력이 반영되어 있었고, 이런 노력들이 작품에 참신성을 부여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 4에 들어와서 이런 고민이 상당부분 희석되고, 오로지 기존 작품들의 매력을 이어갈 새로운 세계관 형성에 급급하는 모습이 관찰된다.
그리고 그 시도들은 거의 다 실패했고, 결국 과거 시리즈의 세계관과 설정, 캐릭터를 재활용하는 방식으로 겨우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내고 있다.
이것은 마블 스튜디오가 더 이상 캐릭터와 설정의 초월성을 가지고서는 기존처럼 매력있는 서사를 창안하지 못한다는 증거라 볼 수 있다.
초월에 대한 서사가 설득력과 호소력을 갖추려면 그것이 현실에 직접 적용될 수 있는 사실적 서사이거나, 아니면 순전한 환상이라 하더라도 계속 초월에 대한 관심과 욕구를 자극할만큼 회기적인 참신성이 있어야 한다. 성경은 전자의 경우에 속하고, 슈퍼히어로 신화와 전설은 후자에 속한다.
그런데 마블 스튜디오의 현 상황은 이런 참신성을 잃어버렸고, 그로 인해 작품의 매력이 점점 더 감소하는 중이다.
마치 4세기경 로마 제국에서 기존 그리스-로마 신화가 생명력을 잃고 기독교 신앙에 밀려난 것과 유사한 국면이다.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면 끊임없는 새로움을 선사해야 하는데, 인간의 사고력으로는 새로운 것을 창안해 내는 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흥행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목표로 두는 경우, 창의성을 발휘하는데 더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는 슈퍼히어로 콘텐츠와 같이 인간의 근원적이고 사실적인 종교성을 관통하지 못하는 환상 기반 초월 서사의 명백한 한계라고 볼 수 있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