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어둠
‘죄로 인한 죽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죽음’, 곧,‘영적인 죽음(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으레 ‘죽음’ 하면 ‘육체의 죽음’만을 떠올린다.
이는 ‘죽은 자’가 자기의 죽음을 알지 못하듯, ‘영적으로 죄로 죽은 자’역시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다면 살려고 스스로 구원자 그리스도께로 나왔을 것이다.
성경이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엡 2:8)’이니 ‘중생의 결과(고전 12:3)’라고 하는 것도, 죄로 죽은 인간은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죄의 죽음이 사람을 ‘하나님에 대한 무지(어둠)’에 가뒀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이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욥 10:22).”
예수님이 죄인들을 일컬어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에 앉은 자들(마 4:16)”이라고 한 것 역시, 죄로 죽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된 인간의 처지를 빗댄 것이다.
‘둘째 사망’인 지옥을 ‘캄캄한 어두움(벧전 2:17)’이라고 한 것도 그곳이 물리적인 빛이 없어서이기도 하거니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빛’이 완전히 차단됐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은 금생에서 이미 ‘캄캄한 지옥’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의와 생명
이에 반해 예수 그리스도는 ‘의, 생명, 빛’으로 비유됐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그리고 이 셋은 변증법적으로 서로 엮어져 있다. 먼저 ‘의’가 ‘생명’과 연결 된다. 이는 ‘의(righteousness)’가 곧 ‘생명(life)’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사’를 결정짓는 것이 ‘의’이다.
사람은 ‘의(righteousness)’가 있어 살고, ‘의의 결핍(the absence of righteousness)’ 혹은 ‘불의(unrighteousness)’로 죽는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하였거니와(롬 10:5)”. “불의한 자(the unrighteous)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 2:9)”.
그런데 성경이 ‘죽음’을 말할 때 대개 ‘의(義)’의 언급 없이 ‘죄로 죽었다’고 한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그러나 이 말을 정확한 뜻은 “죄의 불의(the unrighteousness of sin)로, 혹은 의의 결핍(the absence of righteousness)으로 죽으리라”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사망에서 건지는 것 역시 ‘의(義)’로써 하신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이 죄인을 살리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낸 것은 사실 ‘의(義)’를 보내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가 십자가에서 마지막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신 것은, ‘율법의 의를 다 이루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예수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 믿어 의롭다하심을 받은’ 때문이다. ‘의’없인 ‘구원’도 없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생명과 빛
‘죽음’이 ‘어둠’을 불러왔다면, ‘생명’은 ‘빛’을 불러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여기서 그리스도가 죄인에게 ‘생명의 빛’을 주신다는 말은 ‘의’를 주어 그렇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위 구절을 위시해 대부분의 성경 구절들은 ‘의’가 생략된 채 ‘생명’과 ‘빛’만 언급되므로, 그것을 읽는 독자들은 ‘빛’이 ‘생명’을(혹은 ‘생명’이 ‘빛’을) 주는 것처럼 인식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이 역시 “그 안에 ‘의의 생명’이 있었으니, 이 ‘의의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뜻이다. 더 풀어 설명하면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을 받아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또 어떤 경우엔 ‘생명’이 생략된 채, ‘의’와 ‘빛’이 직접 손을 잡는다.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요(사 59:9)”.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사 62:1)”.
‘의’와 ‘빛’이 짝함은 ‘의’가 죄인에게 ‘생명’을 주어 그를 ‘산 자의 하나님(마 22:32)’과 연합시켜, 하나님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성탄절이다. 암울한 ‘코로나 정국’에도 지상의 교회들은 일제히 ‘죄와 사망의 어두운 세상에 빛이 오셨다’고 찬송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그가 ‘현실의 암울함을 걷어내 주기 위해 왔다’는 말도, ‘문화적 무지(cultural blindness, 文化的無知)를 일깨우는 계몽의 빛이 되려고 왔다’는 말도 아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흑암 속에 있는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와 ‘생명’을 주어 ‘하나님을 알게 해 주기 위해 오셨다’는 말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