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회 안에는 ‘성령’을 ‘오순절주의자들(Pentecostalists)’의 전유물처럼 여기며 그 명칭을 사용하는 자체를 터부(taboo)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같은 교단 내의 사람들이 ‘성령’을 강조하면, 즉각 사경(斜傾)된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성령’은 ‘삼위(a third personality) 하나님’이시다. ‘성령’을 터부시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터부시하는 것이다. 신약의 예수님과 사도들은 다반사로 ‘성령’을 언급했다.
심지어 그리스도 강림 전 구약 성경에서조차 ‘하나님의 신(the spirit of God, 창 41:38)’, ‘성신(Holy Spirit, 시 51:11)’, ‘거룩한 신의 영(the spirit of the holy gods, 단 4:9)’ 등으로 표현했다.
다만 신약에서처럼 많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그(성령)의 발출원(the origin of procession of the Holy Spirit)인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인을 ‘성령 없는 신앙인(유 1:19)’이라고 한 것은 단지 그에게 ‘성령이 부재하다’는 뜻이 아니다. ‘성령의 발출원’인 ‘성자’와 ‘그와 일체(一體)이신 성부’의 부재까지를 의미한다. 이렇게 ‘성자’와 ‘성자’가 부재한 사람에게 구원이 불가능한 것은 당연하다.
◈‘회개하여 성령을 받는다’는 의미
‘성령 수납(the reception of the holy spirit)’은 인간이 어떤 조건을 충족시킨 결과물이 아니다. 오순절주의자나 알미니안들이 ‘성령 받는 법’ 같은 공교한 방책을 고안한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것은 단지 ‘성령 수납원리의 왜곡’을 넘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심대한 왜곡’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 수납이 은혜(믿음)가 아닌 인간의 행위로 결정된다’는 말로 들릴 뿐더러, ‘일체이신 삼위(三位)가 분리될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죄인이 ‘구원’을 받을 때 ‘성령’도 함께 수납한다. ‘구원’만 받고 ‘성령’은 못 받는다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구원’을 믿음으로 받았다면 ‘성령’도 믿음으로 받는다. 다음 말씀 역시 ‘구원’과 ‘성령 수납’을 같은 연장선상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구원)’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3-14).”
삼위(三位)는 일체이시므로 존재 양식도 일체적이다. ‘성자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와 일체이신 ‘성부’를 영접하게 되고 나아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성령’도 영접한다.
만일 성자를 영접할 때 ‘성자와 성부’만 영접하고 ‘성령’은 ‘특별한 때’에 ‘특별한 방법’으로 영접한다면, 그것은 ‘삼위의 일체됨’를 부정하는 일이다.
다음 구절은 ‘회개, 죄사함, 세례, 성령 수납’의 관계를 잘 설명해 준다. 이 넷의 상관관계를 바로 이해하면 ‘성령 수납’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막을 수 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결론부터 말하면,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뜻이다.
이는 ‘회개’와 ‘세례’는 ‘믿음’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는 단지 인간에게서 발분된 그의 독자적인 행위가 아니라 ‘믿음’과 동시에 발생한 ‘은혜’의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회개가 일어나고, 회개가 일어날 때 믿음이 생겨난다. ‘믿음의 회개(the repentance of faith)’ 혹은 ‘회개의 믿음(the faith of repentance)’이다. 둘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 중 ‘회개(repentance)’를 ‘은혜’가 아닌 로마가톨릭의 ‘보속(penance)’ 개념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의 결과물’인 ‘죄사함’도 ‘오직 믿음만’으로가 아닌 ‘보속적 행위’가 첨가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만큼 나아가진 않았지만, ‘눈물 콧물’ 쏙 빼고 ‘도덕적 완전’이 수반되는 특별함이 있어야 진정한 ‘회개’이고, 그런 회개를 해야 성령을 받는다는 이들이 있다. 다 비성경적인 회개관이다.
‘세례’ 역시 성령을 받는 조건으로서의 ‘제의(cultus, 祭儀)’, 곧 ‘인간의 의행(義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례’는 ‘믿음’의 다른 표현이다.
‘세례’가 죄를 씻는 ‘죄사함’을 상징하고, 죄사함을 받는 유일한 길이 ‘믿음’이라고 할 때, ‘세례’와 ‘믿음’은 서로 치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 모두를 종합하면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는 ‘회개의 믿음(혹은 믿음의 회개)로 죄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받는다’이다.
다음은 그것을 지지해 주는 성경 구절 중 하나이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2, 5).”
◈성령을 받으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는 말씀은 ‘성령 수납’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 중 하나이며, 다음 몇 가지 의미를 함의한다.
먼저 ‘복음은 오직 성령으로만 증거 될 수 있기에, 오직 성령을 의지하고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다(이 말씀은 당시 복음전도를 나가는 제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다).
또 이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이니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와 일체이신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고(요일 2:23), 그것은 나아가 ‘나와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요 15:25)을 영접’하는 것이니 나를 영접하면 ‘성령의 부음’을 받는다”는 뜻이다.
나아가 전도의 능력을 위해 ‘성령의 부음(the anointing of the Holy Spirit)’이 필요할 땐 ‘성령의 발출원’인 내게로 와서 그것을 받으라는 뜻이다.
‘성령 수납’에 대한 또 하나의 가르침을 주는 말씀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이다. 이 역시 ‘처음 믿을 때 성령을 못 받을 가능성이 있으며, 성령 수납을 위해 특별한 무엇(special thing)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믿는 자는 다 성령을 받은 자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오히려 이는 “표적(a sign)이 있을 만큼의 강력하고 충만한 ‘성령의 부음’이 있었느냐”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누구나 성령을 수납하지만 이후 사람에 따라 ‘부으심의 정도’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는 말씀 역시, ‘이제까지 받지 못한 성령을 구하라’는 것이 아닌 ‘더 많은 성령의 부음을 구하라’는 뜻이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πληρουσθε, 현재수동태 명령형, 엡 5:18)’는 명령 역시 ‘더 많은 성령의 부음을 구하라’는 뜻이고, 그리고 그것이 ‘현재적이고 지속적이 되게 하라’는 뜻이다.
에스겔이 본 ‘생명수의 환상’ 중에 보인 ‘발목 정도’, ‘무릎 정도’, ‘허리 정도’, ‘가슴 정도’, 그리고 ‘헤엄할 정도(겔 47:3-5)’의 수심(水深) 차이는 ‘성령의 부음’에 차이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맨 처음 ‘발목’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행 19:2)”고 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마지막의 ‘창일’은 ‘성령의 충만(엡 5:18)’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을 때 이미 다 성령을 수납하였지만, 이후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천착하고, 성령을 갈망하고 기도생활을 하느냐에 따라 ‘부음의 정도’가 다를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여러분 모두 ‘창일하여 헤엄칠 정도의 성령 충만’을 받으시라!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