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변화시키는 ‘행복 신학’ 20] 십자가를 품은 그들
한때 섬겼던 교회에 ‘소망부’라는 장애인 부서가 있다. 20-30대 미혼으로 다양한 친구들이 함께하는 공동체이다. 매주 휠체어에 온몸이 묶여 오는 친구도 있고, 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하는 친구도 있다.
또 주일마다 필자의 설교에 다른 친구들보다 최고로 ‘리액션’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친구도 있고, 끊임없이 교사들의 연락처를 캐묻는 집요한 친구도 있다.
그 중에서도 좀 특이한 친구가 있었다. 교회에 부임한 이후로 한 번도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자매이다. 아무리 말을 걸고 질문을 해도 대답을 하지 않는, 아니 어쩌면 대답을 못하는(?) 친구이다. 지적장애인의 여러 유형 중 하나로 보인다.
그런데 어느 주일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부 사도신경 설교가 끝나고 2부 순서를 진행하는 교사가 설교 퀴즈를 내고 있었다. 그때 이 친구가 뭔가 대답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앞으로 불려 나갔다. 진행하는 교사가 한 번 더 질문을 들려줬다.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어디에 못 박히셨을까요? 오늘은 우리 지수가 과연 말을 할지 지켜보겠습니다.”
우리 친구들과 교사들은 웃음이 ‘빵’ 터졌다. 이번에도 선생님이 대신 대답해 줄 거라고 다들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말을 내뱉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행하는 교사도 지수가 말을 내뱉도록 힘써 돕고 있었다. 그 순간 지수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십… 십자가!”
모두들 잘못 들은 줄 알고 숨을 죽이고서 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십자가!”
역시 이 친구가 직접 말을 내뱉고 있었다. 나도 내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지수의 입에서 또렷한 발음으로 “십자가!”라는 말이 들렸다. 진행하는 교사 말로는 ‘10년 만에’ 드디어 지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 순간 나는 소망부의 구호가 떠올랐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소망부!”
부임한 후로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소망부 구호이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소망부 친구들이 되자는 간절한 외침이다!
그런데 우리 친구들에게는 또 하나의 ‘십자가’가 있다. 그들의 몸에 지닌 장애라는 ‘십자가’이다. 비장애들인은 절대 가질 수 없는 십자가이다. 매주 구호를 외칠 때마다 십자가의 그런 이중적인 의미가 동시에 떠올라서,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그런데 우리 친구들은 십자가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자랑하는 듯했다.
아무튼 처음으로 내뱉은 지수의 말, “십자가!”가 한동안 하루종일 나의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과연 나도 말을 처음으로 다시 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외치고 싶은 그 한 마디가 무엇일까? 나중에 주님을 직접 대면했을 때 “율이 네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그 한 마디를 들려줄래?”라고 물으신다면, 과연 나는 “십자가!”를 외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까?
필자는 소망부 친구들과 매주 예배를 드리면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주께서 이들의 마음 속에 십자가를 살아 있는 신앙고백으로 새겨 두신 사실을 자주 깨닫는다. 성경과 교리 지식은 비장애인보다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 친구들의 존재 내면에 심겨 있는 ‘신지식(cognitio Dei)’이 참으로 심오함을 자주 깨닫는다.
최근 필자의 사무실에 그때 드 소망부가 단체로 방문했을 때 정말 감격스러웠다. 사임하고 떠나간 교역자를 기억하고 아마 십자가의 사랑을 못 잊어 찾아온 거라고 믿었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20명의 친구들과 교사들이 비좁게 앉아서 이전의 구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천국 가족의 모습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그리고 다른 어떤 모습을 가진 자라도 오직 주님의 십자가 사랑 하나로 함께하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정말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교회 공동체가 심히 그리운 요즘이다.
권율 목사
경북대 영어영문학과(B.A.)와 고려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M.Div.)를 마치고 청년들을 위한 사역에 힘쓰고 있다. SFC(학생신앙운동) 캠퍼스 사역 경험으로 청년연합수련회와 결혼예비학교 등을 섬기고 있다.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폭력 및 부모 이혼 등의 어려운 환경에서 복음으로 인생이 개혁되는 체험을 했다. 성경과 교리에 관심이 컸는데, 연애하는 중에도 계속 그 불이 꺼지지 않았다. 현재 부산 세계로병원 원목(협력)으로 섬기면서 여러 모양으로 국내선교를 감당하는 중이며, 매년 선교지(몽골, 필리핀) 신학교 강사로도 섬기고 있다.
저서는 <올인원 사도신경>, <올인원 주기도문>, <올인원 십계명>, <연애 신학> 등이 있고, 역서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영한대조)>외 3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