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영생’과 ‘생명의 경험으로서의 영생’
기독교의 ‘영생(eternal life, 永生)’ 개념엔 두 가지가 함의돼 있다. 하나는 흔히 생각하는 ‘시간의 영생’이다. 말 그대로 ‘다함이 없는 영원(eternal eternity)’이다. 이 ‘시간 영생(the eternity as the time)’은 죽음이 지배하는 금생(今生)에선 실현될 수 없으며, 육체를 벗은 사후 세계(혹은 새예루살렘, 계 21:3-4)에서만 경험된다.
둘째는 ‘생명의 경험(the experience of life)으로서의 영생’이다. 이는 시간과 무관하며 유한된 삶 속에서도 경험된다. 이 경험이 찰나적인 나그네 인생길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극복하게 해 준다.
‘죄’와 그로 인한 ‘사망’이 인간에게 ‘썩어짐’과 ‘허무함’을 경험시켰다면, ‘그리스도의 의(義)’와 그로 인한 ‘영생’이 그들에게 ‘생명’과 ‘만족’을 경험시킨다.
성경 역시 ‘시간의 영생(the eternity as the time)’과 ‘생명의 경험(the experience of life)으로서의 영생’ 둘 다를 가르친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단 7:18)”. ‘시간의 영원’을 일컬음이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4:14; 6:35)”.
‘생명의 경험(the experience of life)으로서의 영생’을 일컬음이다. 여기서 ‘생명의 떡’,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함’은 ‘영생’의 경험적인 측면을 빗댄 말이다.
그리고 이 ‘영생’은 ‘그리스도 안’에 존치한다.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죽음의 정복’과 ‘의(義)의 시여’를 통해 왔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요 6:23)”.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대개 이단들은 위에 말한 ‘영생’의 두 개념을 다 공유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에겐 그것이 모순돼 보이기 때문이다.
OO교엔 ‘시간 영생(the eternity as the time)’의 개념만 있다. ‘영생’을 단지 일차원적으로만 접근한 결과이다. 그들이 ‘교주의 죽음’ 후 그것을 감추려고 온갖 감언이설을 한 것은 이해가 갈 만 하다. 이는 그들에겐 ‘시간 영생’만이 전부이기에 그것이 부정되는 순간 자신들의 정체성도 함께 무너지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것만 인정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겐 교훈을 위한 ‘미학적(aesthetic, 美學的)인 영생’ 개념만 있고, 성경이 말하는 초자연적인 ‘시간 영생’은 없다. 그들에게 그것은 허황된 미신으로 간주될 뿐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영생’ 개념을 다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죽을 육체 때문에 ‘시간 영생’이 금생에선 그들의 것이 못 되며, 육체를 벗는 그 날 비로소 그들의 것이 된다.
그러나 ‘생명의 경험으로서의 영생’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서 날마다 현재적으로 공유되며(요 6:54), 그러한 경험이 인간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이기도록 해 준다.
◈은사요, 명령인 영생
‘죽음의 지배’아래서 ‘유한됨의 허무감(the emptiness of the limited)’에 빠진 죄인들에게 ‘의로 말미암은 영생’은 최고의 지복(至福)이다. 성경이 ‘영생’을 복(시 133:3)으로 지칭한 것은 지당하다.
그리고 그 영생의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사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롬 6:23)”.
‘사망’이 ‘죄의 대가’ 곧, 행한 대로 갚음을 받은 ‘공의의 결과’라면, ‘영생’은 ‘무엇의 대가’가 아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말이다.
다음 구절들은 ‘영생’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사’임을 가르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또한 영생은 ‘은사’일 뿐더러,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기도 하다. 대개 사람들은 영생이 ‘은사’인 것은 인정하나, ‘명령’인 줄은 잘 모른다. 은사(선물)은 그것을 수납하는 자가 원치 않으면 배척할 수 있지만 ‘명령’은 거부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영생’을 ‘은사’로 주셨을 뿐더러, 그것이 거부될 수 없도록 ‘명령’으로 주셨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commanded) 곧 영생이라(시 133:3)”.
사도 요한은 이 ‘명령(command)’을 부드럽게 ‘아버지의 뜻(Father's will)’으로 고쳐 말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 6:40)”. ‘아버지의 뜻’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점에서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명령’과 동의어다.
이는 ‘영생’을 은사로 받은 자는 반드시 그것을 받고야 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영생을 은사로 주시려고 작정한 자에겐 기어코 그것을 주시고야 말며, ‘아무도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