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사랑’과 ‘두려움’은 공존할 수 없다. ‘사랑’하든지 ‘두려워’하든지 할 뿐이다. ‘사랑’이 오면 ‘두려움’이 쫓겨나가고, ‘두려움’이 오면 ‘사랑’이 쫓겨나간다.
성경도 이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요일 4:18)”고 표현했고,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요일 4:18)”고 쐐기를 박는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으니(요일 4:18)” 그것을 용납하지 말라고 주문하며, ‘두려움’이 갖다 주는 파괴적인 결과까지 덧붙인다.
그럼 이 ‘두려움’은 무엇일까? 단지 ‘두려움의 감정’일까? 그래서 ‘두려운 감정에는 형벌이 따른다’고 한 것인가?
이는 아닌 듯하다. 만일 그렇다면 생득적으로 겁이 많거나 정서적으로 유약하여 무서움을 잘 타는 사람은 다 형벌을 받는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엔 보다 근원적인, ‘구원론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형벌은 언제나 구원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하나님의 사랑을 못 이뤄(요일 4:18) 두려움을 가진 자에게 형벌이 따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런 해석과는 다르게 많이 왜곡돼 왔다. 그들 중엔 ‘그리스도 신앙’을 유일한 구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율법주의자들’도 있고, 자칭 ‘정통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전자(율법주의자)는 근본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기에 아예 논외로 치지만, 후자(그리스도인)의 주장은 매우 진지하며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의 논거는 대개 이렇다. 사람들에게 너무 ‘믿음과 은혜’에 기반한 ‘구원의 확신’만을 가르치면, 방종과 부주의로 흐르게 해 그들의 구원에 해악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럴 듯하다.
그러나 이는 저급한 ‘이성적 논거’에 따른 것이며, 또한 ‘구원’을 오직 ‘사람의 일’로만 간주한 데서 나온 주장이다. 그리고 이런 율법적이고 이성적인 논거에 따른 ‘두려움’의 개념으로는 사람의 영혼을 분발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구원의 미(未)보장으로 인한 ‘불안’과 ‘노예적 두려움(slavish fear, phobos)’은 사람의 영혼을 마비시키고 절망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두려움의 실체
율법주의자들의 ‘노예적 두려움’과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갖는 ‘은혜의 두려움(graceful fear, 행 9:31, 롬 3:18)’은 그들의 영혼을 각성, 분발시킨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은 ‘구원과 두려움’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도움이 될 만하다.
그 뜻은 “죄의 유혹으로 마음이 강퍅케 되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놓칠까(히 3:12)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다. 한 마디로 ‘복음 신앙에서 흔들리지 말라’는 경고이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7-8, 12)”.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이것을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니 ‘구원에서 떨어질까’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율법주의 구원(Legal Salvation)’의 근거로 삼았고, 이런 곡해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불확실성’과 그로 인한 ‘두려움’과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과거 일부 청교도들의 정신병 원인이 ‘구원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신들의 불완전함이 자신의 구원을 망칠 것이다’는 ‘율법주의적 구원관(Legal Salvation)’과 그로 인한 밑도 끝도 없는 ‘무저갱적인 두려움’이 그런 결과를 낳았다.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갖는 두려움’은 그들의 것과는 다른, ‘구원의 안전장치(a safety device of salvation)가 있는 은혜의 두려움(graceful fear)’으로서 사람의 영혼을 각성시켜 믿음을 분발케 한다.
◈두려움을 좇아내는 하나님의 사랑
앞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좇아낸다’고 했다. 그럼 그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은 어디 있는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롬 8:39)”,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엡 1:4)”.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다. 혹자는 자연 만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다. ‘솔로몬의 옷보다 더 화려한 들의 백합화(마 6:28)’에서, 혹은 ‘푸르고 광활한 하늘과 넓푸른 대지(시 19:1, 창 13:10)’에서 그의 사랑의 절정을 보려고 한다. (물론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지만(롬 1:20) 그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진 못한다.)
또 혹자는 부, 장수, 권세에서 그것을 찾는다. 그런 것들을 손에 넣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으로, 그렇지 못하면 그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해도 가질 수 있는 것들이다. 악인들과 장망성(將亡城) 바벨론도 그것들의 극치를 누린다(시 74:3-7, 계 18:12-16).
이런 ‘일반은총’은 ‘하나님의 심판’과 ‘그것의 두려움’을 좇아낼 정도의 하나님 사랑을 제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의 죄 때문에 그것들까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됐고, 종국엔 다 스러지고 만다(벧후 3:12, 요일 2:17).
아담의 타락 후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냈다(창 3:18)”는 말은 ‘죄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손상했다’거나 ‘수확량을 줄어들게 했다’는 의미 외에, ‘자연만물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현현할 수 없게 됐다’는 말이기도 하다.
전도자 솔로몬이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 1:8)”고 노래한 것 역시 타락한 자연만물이 인간 영혼에 근원적인 만족을 줄 수 없다는 뜻이다.
욥이 ‘정금과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지 않고,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함’에 유혹되지 않았던 것은(욥 31:24-27) 그의 ‘금욕주의적 태도’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그의 영혼을 매료시킬 만한 하나님 사랑의 실체가 아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성으로 충만해 보이는 자연 만물도(롬 1:20), 찬란해 보이는 ‘부와 장수와 권세’도 ‘그리스도 밖’에선 다 무미건조할 뿐이다. 그것들의 화려함의 심연(深淵)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마 23:27)”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만끽하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