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 연구 시리즈
III. 비유(세상의 기존 가치체계를 전도시키는 혁명적 언어)가 드러내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
1. 하나님 나라는 부유한 자들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소유
예수의 산상설교는 세상의 기득권자들을 무너뜨린다. 하나님의 나라는 강한 권력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강한 자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소유한다. 예수의 산상설교는 로마의 평화질서 같이 무력을 가진 자만이 평화를 독점하는 세속적 질서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다 준다. 하나님 나라 질서는 세상의 가치 질서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다. 약자를 짓누르고 무력으로 세우는 세상의 평화는 하나님 나라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다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부자 청년 이야기(마 19:16-26; 막 10:17-27; 눅 18:18-27)에서 예수는 율법의 외면적 준수를 넘어선 전적인 자기 소유의 포기를 가르치신다. 예수는 자기에게 찾아온 청년에게 ‘영생을 얻기 위하여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청년은 ‘이 모든 계명을 어린 시절 부터 지켰나이다’고 대답한다. 예수는 청년을 향하여 ‘네 자신의 소유를 다 팔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이에 청년은 재산이 많으므로 근심하여 갔다. 예수는 이를 보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신다. 재물 많은 것이 반드시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재물에 애착을 갖는 탐욕이 장애물이 된다. 기독교는 물질이나 권력이나 사회적 명예나 영화 등을 죄로 여기지 않는다. 여기에 애착을 갖는 그 욕심이 하나님 나라에 장애물이 된다.
성경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부유한 족장이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과 솔로몬 등은 왕들이었다. 예수는 랍비였고, 바울은 율법학자였다. 예수가 산상설교에서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그 마음이 가난한 자, 청결한 자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도피하거나 등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를 위하여 다음같이 기도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직장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애착되거나 탐닉하지 않는 가난한 마음의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씨의 성장 같이 자라며, 심령의 상태에 따라 다양한 결실을 맺는다.
씨뿌리는 자 비유는 하나님 나라는 씨의 자람과 같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나라는 씨앗으로 현존한다. 씨앗은 미래를 품은 현재다. 씨앗 안에는 장차 올 하나님 나라가 숨겨져 있다. 씨앗은 약속의 현재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능력으로 스스로 모든 의심과 염려를 물리치고 반드시 결실한다. 씨뿌리는 자 비유가 말하는 씨가 뿌려지는 각 처소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심령의 상태를 나타낸다. 길가, 바위, 가시떨기의 심령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 옥토의 상태는 삼 십 배, 육 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 마음 밭을 개간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받은 자의 내적 투쟁이 필요하다. 결실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와의 내면적 투쟁을 통한 자기 죽임이 필요하다. 그래서 길가가 개간되고, 돌작밭이 정리되고, 가시떨기의 시험에서 자기의 욕심을 극복함으로 이겨내어야 한다. 그러면 복음은 그 마음 속에서 삼 십 배, 육 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3. 하나님 나라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갈라내는 유신론적 이원론이 지배한다.
가라지 비유는 역사과정에서 사회나 교회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가 미리 가라지를 뽑을 필요없다. 역사 종말에 하나님이 알곡은 곳간에 거두어 들이고 가라지는 불 속에 던지신다. 그물 비유도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 나라는 물고기가 모이는 그물과 같아서 그물이 차면, 좋은 물고기는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버리는 것과 같다. 가라지 비유와 그물 비유는 유신론적 이원론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선과 악이 대등한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귀속한다. 선과 악이란 우주를 생성하는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그 분의 뜻을 이루는 오묘한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은 분리된다. 우리 인간이 인위적으로 가라지나 악을 제거할 필요가 없다. 가라지와 악은 항상 알곡과 선에 기생한다. 이것은 타락된 세상의 원리다. 인위적으로 제거할 때 그만큼 힘과 에너지가 소모되며, 심지어는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4. 하나님 나라는 지극히 작은 것에서 자라나 거대한 공동체가 된다.
겨자씨(Mustard Seed)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같이 지극히 작으나 나중에 4-5미터나 되는 거대한 나무가 되는 것과 같다고 가르친다. 겨자씨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것 같이 보이나. 그 속에는 거대한 나무의 능력이 내포되어 있다. 누룩의 비유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누룩처럼 퍼져 나가 큰 공동체가 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독교 공동체는 소아시아를 거쳐 그리스도아 로마를 거쳐 서구에 이르고 미주를 거쳐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퍼져 나가는 지구촌 기독교로 발전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이러한 성격에 대하여 스위스의 신약학자 오스카 쿨만은 『그리스도와 시간』,(Oscar Cullmann, Christus und Zeit, 3. Aufl. 1962, 김근수 역, 『그리스도와 시간』, 솔로몬, 1987, 11), 『역사로서의 구원』이라는 저서에서 한 분 그리스도에서 시작한 구속사의 중심이 열 두 사도, 초대교회, 구속된 인류,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구속사의 확장에 관하여 언급하였다.(Oscar Cullmann, Heil als Geschichte, Tübingen, 1967, 김광식 역, 『구원의 역사』, 대한기독교서회, 1978, 21.)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
5. 하나님 나라는 희생의 원리를 가르친다.
씨의 성장 비유는 씨가 죽어서 싹이 나 자라서 결실하는 것처럼 희생의 원리를 가르친다.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씨의 성장 비유처럼 복음을 전파하면 복음의 씨에서 싹이 나서 반드시 결실한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씨가 발현한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우리의 죄과에 대한 속죄물이 되셨다. 이는 사탄에 지불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지불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같이 아들을 회목제물로 세우신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5-26).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은 예수의 십자가 희생의 공로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2017년에 오백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루터의 종교개혁도 영국의 존 위클리프, 윌리엄 틴데일, 보헤미아의 후스 등 종교개혁 선구자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 복음 전파에도 웨일스의 선교사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의 대동강변에서 순교, 일제 점령기에서의 주기철 목사의 순교, 공산 치하에서 북한에서 조만식 장로, 김관주 목사, 6.25 전쟁시 손양원 목사 등 헤아릴 수 없는 성도들의 순교의 희생에서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가 왕성하게 되었다.
6. 하나님 나라는 밭에 감추어진 보화나 값진 보화와 같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자는 자기 전 소유를 팔아서 이 밭을 산다. 그리고 값진 진주를 발견한 장사가 자기 모든 소유를 팔아서 이 진주를 산다. 이 처럼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전 소유를 팔아서 사는 것이다. 자기 소유를 다 바치지 않고서는 이 값진 보화를 살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 열심을 가져서 정통 바리새인으로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상류층 가문의 출신으로서 스데반을 처형하는 등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에 그의 인생관은 전적으로 바뀌었다. 그는 여태까지 자기가 가치있다고 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하는데 그의 인생을 바쳤다. 바울은 다음 같이 나사렛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7~8).
역사적으로 수많은 기독교 순교자들이 박해와 핍박 속에서 그들의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소유하였다. 2세기 후반 서머나 교회(Smyrna Church)의 감독인 폴리캅(Polycarp, A.D 70~156)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그의 신앙을 순교로 지킨 것은 유명하다. 폴리캅은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경기장으로 끌려 나갔다. 총독은 폴리캅을 불러 "맹세하시오! 나는 당신을 살려 주고 싶소. 그리스도를 저주하시오. 그러면 살려주겠소!"라고 회유했다. 그때 폴리캅은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이 불신앙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한 후 "86년 동안 나는 그리스도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한 번도 내게 잘못하시지 않았고 잘못하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버리고 모독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그는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샀다.
7. 하나님 나라에는 잃은 것을 되찾는 자의 기쁨이 있다.
잃은 양 비유, 잃은 은전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는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연민과 사랑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 비유들은 아혼 아홉 우리의 양보다는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나서서 사자나 이리의 위험에서 구해내는 목자의 헌신과 사랑처럼 하나님의 인간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다. 예수는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세리장 삭개오집에 유하시면서 자기에 대하여 수군거리면서 비난하는 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특히 잃은 아들 비유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인간이 다시 창조주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과정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잃은 아들 비유는 복음서 가운데서도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를 떠난 인간에 대하여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인간을 위하여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게하신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슬람의 알라 신은 자신을 비어 인간을 위하여 중보자가 되시는 대속의 사랑이 없다. 알라는 자신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보복과 처형의 지하드를 명령한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알라를 믿기까지 지하드를 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에 폭력이 난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하시며 그에 반항하는 인류를 먼저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불신의 세상을 위하여 희생제물로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모든 곳에 진정한 용서와 사랑과 화평이 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