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복음
‘복음’이 ‘기쁜 소식’인 것은 그것의 ‘완결성’ 때문이다. 이 ‘복음의 완결성’이 죄인의 구원에 믿음 외에 아무 요구할 것이 없게 했고, 그것이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게 했다.
만일 ‘복음’이 미완결 된 채로 있어 죄인에게 조금이라도 ‘구원의 책무’를 지운다면, 그로 인한 부담감과 염려로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못됐을 것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죄를 구속하셨으므로 그를 믿는 자는 더 이상 율법의 요구를 받지 않는다(혹은 정죄를 받지 않는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운명하시며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시고,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고 한 말씀들은 ‘복음의 완결성’의 근거이다.
‘포로에서의 해방(시 126:1)’, ‘복역의 때를 마침(사 40:20)’, ‘일만 달란트의 채무 탕감(마 18:24-27)’ 역시 ‘그리스도의 구속’이 인간이 지불해야 할 ‘죄책(롬 6:23)과 율법적 의무’를 없이 했다는 ‘복음의 완결성’을 암시한다.
만일 구원을 위해 그에게 어떤 ‘의무’가 지워져 있다면 그는 ‘율법 아래 있는 자’이며, 그에겐 여지없이 심판이 가해진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이렇게 완결된 복음을 주신 것은 ‘전적 무능한(Total Depravity)’ 죄인이 자기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은 종말 심판 때 인간이 자기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을 말씀한다. 곧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0-21)’”. 이는 동시에 ‘율법의 심판’ 앞에서 전적 무능한 죄인이 자기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삼위일체 복음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하심’ 자체가 ‘복음’이다. 삼위일체가 무엇인가? ‘삼위(三位) 하나님이 일체적으로 존재하신다’는 말이다. 더 축약하면, ‘2위(二位)이신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이다.
사도 마가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 1:1)”이라고 한 것은 ‘성육신하신 삼위일체 성자가 복음이다’는 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5)”는 말씀들 역시 ‘삼위일체 성자의 성육신’을 말씀한 것이다.
그리고 성자가 사람이 되신 것은 ‘택자의 구속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성자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으로, ‘그의 피를 구속의 피(엡 1:7, 벧전 1:18-19)’로 말한 것은 그의 구속자 됨을 말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2위 성자만이 인간의 죄를 구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삼위일체 신앙고백’은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삼위일체 복음’을 말한 것이다.
이렇게 ‘성자가 사람 되신 삼위일체 복음’은 죄인들에게 ‘완전한 구원’을 갖다 주며, 그들의 구원을 실패할 수 없도록 ‘성령의 보증’을 담보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그리고 그것은 ‘구원’을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이 되게 하며, ‘인간의 의(義)’를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게 한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저주거리로 여긴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전하기 위한 복음
성경에 나오는 복음(ευαγγελιον, 기쁜 소식)이라는 용어는 B.C. 490년 아테네 동북쪽에 위치한 마라톤(marathon) 들판에서 벌어진 그리스(Greece)와 페르시아(Persian) 간의 전투에서 기원한다.
그리스의 밀리티아데스(Militiades) 장군이 페르시아 군을 격파하고, 자국민들에게 승전보를 알리려고 36.75㎞를 쉬지 않고 달려, ‘우리가 승리했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기뻐하라’고 외치고 죽었다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가 그렇게 했던 것은 전쟁의 패배를 예상하고 간담이 녹고 있을 자국민 그리스인들(Greeks)에게 시급히 들려주어야 할 ‘기쁜 소식(복음)’이었기 때문이다(당시 페르시아는 강대국이었기에 그리스 군이 전투에서 패할 것이 뻔했다).
성경의 ‘복음’ 역시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죄인들을 죽음에서 건져내는 ‘사면장’과 같은 ‘기쁜 소식(복음)’이다. 그것을 듣기만 하면 죄인들이 사망과 두려움에서 살아나게 된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물론 모든 사람이 그것을 듣고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 만 그렇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이처럼 ‘기쁜 소식(복음)’이라는 말 자체가 ‘전달’을 함의한다. ‘전달하지 않는 소식’은 소식이 아니다. 사람들이 매일 새로운 소식을 접하는 것은 이른 아침 집집마다 신문을 넣어주는 배달원들이 있기 때문이다(물론 이젠 TV, Internet, SNS에 의해 더 효율적으로 전달된다).
내게 전해진 ‘기쁜 소식(복음)’은 나를 위한 것인 동시에 타인을 위한 것이다. 내가 복음을 받는 순간 그것을 타인에게 전해야 할 의무가 내게 부과된다. 이 점에서 ‘복음’은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복음에 빚진 자 의식(롬 1:14)’으로 표현했다. 한국적 표현으로 하면, 위에서 아래로 물을 흘려내는 ‘천수답(天水畓) 원리’에 비견된다. 곧 윗 논(畓)으로부터 물을 받은 아랫 논은 다시 그 아랫 논으로 흘려보내듯, 내게 전해진 복음으로 내가 먼저 해갈하고 다시 그것을 타인에게로 흘러 보내야 한다는 말이다.
아랫 논의 생존이 윗 논에 의존됐듯, 타인의 구원은 복음을 먼저 받은 내게 의존돼 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고 한 것도 이 ‘복음의 천수답 원리’를 거스리는 자에 대한 경고이다.
‘복음에 빚진 자 의식’으로 충만했던 사도들은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놀랍고도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사 52:7, 새번역)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무엇보다 ‘삼위일체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복음을 전하셨다는 사실이 우리를 숙연케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눅 4:43, 44).”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