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욱 교수의 Engagement] 종말론적 성숙 제언
1. 종말론의 전통적 네 가지 학설 존재 인정
2. 네 가지의 차이 구원과 본질적 관계 없어
3. 다른 입장 가진 이들 존중하고 관용해야
4. 어느 것이 좀더 맞는지 따져보는 노력을
어느새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지 2년이 다 되었다. 최근에 나타난 오미크론 변종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각국을 강타했다. 하지만 최근 이 나라들은 방역의 고삐를 풀면서 ‘위드 코로나’ 시대를 앞당겼다.
필자가 살고 있는 미국의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도 지난 한 달 동안 확진자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콜로라도 주 전체 인구가 5백만 명이 좀 넘는다. 그런데 어떤 날은 하루에 3만 명의 확진자가 나오기도 했다. 한국 인구 5천만 명에 대입할 경우, 하루 확진자가 30만 명이 나온 셈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실내에서 마스크를 쓰라는 주 정부의 명령을 철회하고, 시민들의 자율적 방역의식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방역 정책이 전환되었다.
필자는 콜로라도 주의 대형교회인 Cherry Hills Community Church를 출석하고 있다. 한번 예배드릴 때 2-3천 명이 한 예배당에 모인다. 그래도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은 1퍼센트(20-30명)도 채 안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정치 방역’이 진행 중이다. 그리고 최근 하루 확진자가 3만 명을 넘었다. 앞으로 하루 확진자 10만 명이 되는 상황도 올 수 있다는 예측들이 나오고 있다.
정치 방역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과학적인 데이터와 상식적인 지혜에 기초한 방역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대한민국을 불쌍히 여기셔서 속히 코로나 팬데믹이 종료되기를 기도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려서 고통당했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현 정부의 ‘정치 방역’으로 교회가 폐쇄되고, 예배가 취소되는 신앙적 어려움을 겪었다.
특별히 자영업자들은 천문학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로 인해 많은 자영업자들의 경제적 재기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 외에도 코로나 팬데믹이 가져다 준 부정적인 열매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이 가져온 한 가지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역사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평소에 무관심했던 성도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전 지구적 팬데믹이 예수님 재림의 징조들 중 하나라는 생각이 점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즉 종말론적 대각성 (eschatological awakening)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점은, 코로나 팬데믹이 매개한 종말론적 각성이 건강하고 균형잡힌 종말론의 확립을 도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종말론적 각성은 일어났지만, 도리어 건강하지 못하고 균형을 상실한 종말론이 한국교회에서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일부 극단적인 사람들은 코로나 백신을 666 짐승의 표라고 주장하면서, 백신을 맞으면 지옥에 간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런 주장에 현혹된 많은 사람들이 백신 접종을 회피하면서, 개인적으로·공동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또한 일부 세대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임박한 교회의 휴거를 강조하면서, 성도들이 불안과 긴장 속에 살게 하고 있다. 동시에 환난 전 교회의 휴거를 거부하고, 교회가 대환난을 통과하며 그 이후에 휴거를 경험한다고 가르치는 목사들을 거짓 목사라고 정죄하는 세대주의권 목사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한국교회 내의 종말론적 혼란을 틈타 세력을 확장한 이단들은 더욱 더 많은 추종자들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 한국교회에 대한 거대한 위협 세력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이 안타까운 상황을 간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 내의 종말론에 대한 혼란과 혼돈을 정리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더 건강하고, 균형잡힌, 성경적 종말론의 확립을 추구해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아래 몇 가지 사항들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첫째, 종말론의 중요한 영역인 휴거, 대환난, 천년왕국과 관련해서 전통적으로 네 가지 학설이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그것은 역사적 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무천년설, 후천년설이다.
둘째, 이 네 가지 학설들은 구원과는 본질적인 관계가 없는 이차적 진리(secondary truth)임에 대한 확인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참된 그리스도인이 역사적 전천년설자가 될 수도 있고,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자가 될 수도 있고, 무천년설자가 될 수도, 후천년설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미 별세하여 낙원에 입성한 참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레니우스, 찰스 스펄전, 박형룡, 박윤선 같은 역사적 전천년설자도, 스코필드, 잘스 라이리 같은 세대주의자도, 어거스틴이나 칼빈같은 무천년설자도, 조나단 에드워즈나 존 웨슬리 같은 후천년설자도 있다는 말이다.
셋째, 따라서 자신의 종말론적 입장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는 존중과 관용이라는 점을 확인해야 한다. 나와 다른 종말론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거짓 목사니, 거짓 그리스도인이니 정죄하는 태도는 결코 성경적이지 않으며, 결코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세가 아니다.
넷째, 서로의 관점과 입장을 존중하고 관용하면서도, 참된 의미로 거듭난 신학자, 목회자, 성도들은 이 네가지 학설들 중에 어느 것이 좀더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 또 하나님의 전 경륜과 조화되는지를 묻고, 신중하게 따져보는 노력을 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선의의 경쟁, 사랑의 경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선의와 사랑의 경쟁은 자신과 다른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무찌르고 파괴시키려는 경쟁이 아니다. 이것은 각자의 믿음, 확신, 그리고 신앙양심을 존중하면서도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려는(엡 4:13)” 거룩한 노력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는(엡 4:14)”는 성숙한 추구이다.
동시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는 말씀에 순종하려는 몸짓이다.
필자가 제시한 위의 네 가지 원칙만이라도 잘 지켜진다면, 한국교회의 종말론적 신학과 신앙은 지금보다 몇 차원 더 성숙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 아름답고 거룩한 일이 주님의 뜻 안에서 속히 성취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정성욱 박사
美 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저서 <티타임에 나누는 기독교 변증>, <10시간 만에 끝내는 스피드 조직신학>, <삶 속에 적용하는 LIFE 삼위일체 신학(이상 홍성사)>, <한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 <한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 <한눈에 보는 십자가 신학과 영성>, <정성욱 교수와 존 칼빈의 대화(이상 부흥과개혁사)>, <한국교회 이렇게 변해야 산다(큐리오스북스)>, <밝고 행복한 종말론(눈출판그룹)>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