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벨 에포크의 데카당스가 극에 달하면서 세계대전이 터졌다. 전쟁은 사회 전체를 뒤집어 놓는다. 전쟁은 가족을 이산시키고, 젊은이들을 통제 밖으로 내몰아 도덕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더구나 규모가 큰 세계대전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일차 세계대전은 그동안 유럽에서 누적되어 오던 남녀관계, 성도덕, 환락주의, 매춘, 성병 같은 누적된 “도덕적 타락” 문제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대규모로 악화시켰다.
일차세계대전 동안 참전국들은 국가 총동원을 통해 전쟁이 이기려고 하였다. 유럽 각국의 미디어들은 감정적 호소와 공공연한 거짓말 등을 동원하면서 특정 사회 집단의 공격 또는 지지하거나, 다른 나라들을 적대시하고 악마화하는 기사들을 써댐으로 여론을 조작하려 하였다. 신문은 고향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가정과 정조를 지키는 신앙심 깊은 여성에 대한 기사를 씀으로 전사들에게 용감하게 싸우게 정신적 힘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이 달랐다.
무엇보다 병사와 후방의 여성 모두에서 전통적 남성성과 여성성 개념에 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젊은 남자들은 언제 전장으로 끌려가 죽을지 모르는 불안 상태에서 환락에 빠졌고, 전쟁 동안에는 “전장에서 포탄 작열로 인한 충격(트라우마)”(shell shock)과 성병으로 남성성이 시험받았다. 어떤 병사는 강철 같은 정신의, 성적으로 순결한, 그리고 감정적으로 잘 훈련된 전사로서, 위로부터 주어진 “남성성” 이미지를 실현하려고 애쓰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상처받고 자포자기하며 자신의 감정적 및 성적 욕망에 따라 행동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온 제대 군인들은 전쟁 때의 경험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어려웠다.
일선의 젊은 병사들은 기회 있는 대로 창녀를 찾고 그래서 성병에 걸렸다. 휴가든 부상으로 후송되든 후방 도시에 오게 되면, 의례 여자를 찾았다. 그러면서 고향에 부인이 있던 병사들은 자기 부인의 정조에 대해 불안해하였다. 전쟁동안 정부와 군대는 성욕과 성병에 좌절된 수백만의 남자들과, 가난해진 그리고 성욕에 굶주린 후방의 여자들의 문제에 대응하여야 했다. 가장 즉각적인 문제는 전방과 후방 모두에서 매독과 임질 같은 성병이 창궐하였다는 사실이다. 성병은 군사의 사기저하 뿐 아니라 실제 전투력이 감퇴 시켰고, 종족 유지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성병을 막기 위해 유럽 각국의 군대는 훈련소에서부터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한다는”는 포스터를 붙였다. 심지어 영국에서는 매춘부 뿐 아니라 후방의 모든 여성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독일에서는 병사들을 조사하여 성병을 옮긴 여자가 확인되면 처벌하였다. 어떤 국가에서는 전선 바로 후방에 매음굴을 조직하고 매춘부들을 관리하였다. 군대와 의무대의 상관들은, 여성이 성병전파의 원인이라 하면서 여성에 대한 분노를 부추겼다.
점령지에서는 적국 병사에 의한 강간이 국가적 문제가 되었다. 정부는 피해자의 정신적 트라우마에 관심을 갖기보다, 강간과 폭력 사건을 적국(주로 독일)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데 이용하였다. 그 강간 사건 소식은 전쟁을 더욱 정당화하고, 모욕을 느낀 남자들이 더욱 공격적으로 싸우도록 만들었으며, 조국과 여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남자들을 군대에 들어오도록 동기 부여하는 아젠다로 이용되었다.
군대 내 동성애는 은밀하였는지는 몰라도 엄격히 통제되었다. 그러나 참호라는 왜곡되고 트라우마가 많은 상황에서 어떤 병사들은 자신의 젠더를 혼동하는 환상을 가졌고, 남자들끼리의 친밀을 “전우애”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성지남의 변화가 아니라 전투에 의한 스트레스의 일시적 해소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게이인 병사들은 군대 생활은 자신의 동성애가 용납되는 이상적 공간이라 생각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회로 귀환한 게이 병사들은 잘 단련된 남성과잉적인 이상적 전사로서 “지배자”라는 이미지를 유지하려 했다. 이성애자 남자 군인들은 여자들에게 분노를 느꼈듯이, 게이 군인들은 여성화된 동성애자들에 대해 분노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