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절대적인 연약성’과 ‘상대적인 연약성’
◈자연 신앙으로 이끄는 인간의 ‘상대적인 연약성’
성경은 ‘인간의 약함’을 칭송한다. 이는 그 ‘약함’이 죄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것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 구절들이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20)”.
그러나 ‘약한 자’라고 다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다. 이는 조금만 우리 주위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저 정도면 예수를 믿을 만한데’라고 생각되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사람도, 안 믿는다.
심지어 마지막 숨이 넘어가면서도 믿으라는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다 ‘인간의 완악함’과 함께 ‘인간의 약함이 저절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나아가 사도 바울의 말대로 ‘믿음’은 ‘성령의 산물(고전 12:3)’이고, 기독교가 ‘자연종교(naturalreligion)’가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또 성경은 ‘인간의 무지(無知)’를 칭송한다. 사람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5-26)”라고 했다.
사도 바울 역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고전 1:25-27)”고 했다. 칼빈 같은 신학자도 ‘기독교의 어리석음(the foolishness of Christianity)’을 칭송했다.
이 역시 ‘인간의 무지’가 절로 하나님을 믿게 한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무지한 자는 다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무지한 자들(the foolish)’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많고, ‘지혜자들(the wise)’ 중에도 믿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다.
초대교회 당대 지혜자의 대명사인 헬라인들(Greeks) 중에도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 17:12)”,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가 ‘히브리파 유대인 기독교도들’과 ‘헬라파 유대인 기독교도들’을 대상으로 썼고, 서신서들 중 상당 부분이 둘의 화해를 도모하려고 씌어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약함’과 ‘무지’가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외적 환경을 제공할 순 있으나 그것들이 구원 신앙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치 이는 ‘자연만물’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에 대한 핑계’를 못 대게 하지만(롬 1:20),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지는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삼위일체 신앙으로 이끄는 인간의 ‘절대적인 연약성’
만일 ‘신앙’이 단지 인간의 연약성(편의상 여기선 ‘상대적인 연약성(relative weakness)’으로 칭하겠다)을 극복하기 위한 종교 행위로 정의된다면 그것이 꼭 기독교 신앙일 필요는 없다. 그런 신앙은 ‘원시적인 샤머니즘(shamanism) 종교로부터 고등종교(higher religion)’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널려 있다.
주지하듯 ‘종교’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대개 ‘자연 재해나 질병, 죽음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 뭔가 의지할 대상을 찾아 숭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에 기반한 인간의 의존 행위’로 정의된 그런 사전적 의미의 종교 신앙은 그의 약함이 사라지는 순간 그것의 필요도 함께 사라진다. 이는 과학, 의학, 경제의 괄목할 만한 발달을 이룬 근세 유럽에서 종교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감소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극도로 피폐했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과 함께 발흥(發興)하여 1970년대를 기점으로 피크를 이뤘던 한국의 기독교가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룬 198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모든 현상은 그 신앙이 다소간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자각’에 기반 했고, 이후 그 연약성이 보완 혹은 소멸됐다 싶으면 그에 따른 신앙도 급격히 약화되기 때문이다.
반면 상대 개념으로서의 ‘절대적 연약성(absolute weakness)’이 있다. 곧 ‘죄의 연약성(weakness by sin)’이다. ‘절대적’이라는 수식어(修飾語)가 붙은 것은 그것이 ‘무능하냐 유능하냐, 지혜로우냐 어리석으냐’ 같은 ‘가변적(可變的)’인 것이 아닌 ‘불변적(不變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자력으론 벗을 수가 없고,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성자(聖子)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그리스도의 구속)이 요구하는 신앙은 의존을 속성으로 하는 ‘일반의 종교신앙(자연 신앙)’과는 다른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마 16:16, 요 20:28)’이다.
이러한 ‘절대적 연약성’에 대한 자각과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은 오직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6-17)”,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오늘 교회 출입을 하지만 자신의 ‘상대적인 연약성(relative weakness)’에 기반한 ‘일반의 종교 신앙(자연 신앙)’에만 머물러 있는 자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에 대해선 복음을 몰라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지만, 신앙의 연조가 깊음에도 여전히 그런 저급한 신앙에 머물러 있다면 큰 문제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