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롬 2:23-25)”.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인데, 일견 서로 모순된 내용들이 얽혀 있는 것 같다. ‘율법을 자랑하며 율법을 범하지 않았다’고 해야 하는데, ‘율법을 자랑하면서 율법을 범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부러 율법을 짓밟거나 율법 준수를 등한히 해서 그랬다는 말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세계 제일의 ‘하나님 경외자’로 자처하며 율법 준수에 열심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이 ‘율법을 왜곡되게 자랑하므로 율법을 범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는 뜻이다.
◈율법주의의 위선
다시 말하지만, 위에 인용된 말씀은 단지 유대인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못 지켜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에게서 모독을 받았다는 말이 아니다. 율법에 대한 그릇된 태도, 곧 ‘교리의 왜곡’ 때문에 일어나 결과이다.
그들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 의롭다함을 받는다’며 ‘자신들의 율법적 의’를 자랑했는데(그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았는데), 그들에게서 흠결이 나타나니 지금까지의 그들의 경건이 위선으로 판명되고 그것이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는 말이다.
이제껏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받은 신뢰와 존경이 실제 그들의 완전한 삶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흠결을 감춘 종교적인 기술(外飾)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 것이다. 물론 그들의 ‘외식(ostensible display, 外飾)’은 ‘위선(hypocrisy, 僞善)’과는 다르다(성경은 둘의 구분 없이 모두 ‘hypocrisy’로 표현했지만 한국어는 미묘한 차이가 진다).
전자(외식)는 악의 없이 ‘단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얻으려 겉을 좋게 꾸미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완전을 지향한 그들에게서 허물이 드러나면 위선자로 보일 것이 두려워 자신들을 포장한 것이다.
반면 후자(위선)는 ‘부정한 목적으로 자신들을 포장하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사기꾼이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려 자신들의 악을 감추고 선하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딤전 6:5)”이라고 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단순한 ‘외식자(外飾者)’도 있었지만, ‘위선자(僞善者)’들도 있었다. 굳이 둘을 명명(命名)한다면 전자는 ‘무의식적 위선’이고, 후자는 ‘의도적 위선’이다. 오늘날 ‘그릇된 확신으로 진리를 부정하는’ 이단(異端)과 ‘의도적으로 진리를 부정하는’ 사이비(似而非)에 비견된다.
◈단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기는 율법
‘율법’은 전체를 다 준수해야 비로소 준수한 것이 된다. 99개를 지키다가 하나를 못 지켜도 율법 100개 전체를 못 지킨 것이 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이는 ‘율법주의’를 ‘누룩’에 비유해 가르친 말씀에서도 나타난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9)”.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 16:6).” 작은 율법 하나를 범하면 그 범법(犯法)함이 율법 전체까지 영향을 미쳐 율법 전체를 파괴한다는 뜻이다.
율법 조문 하나하나는 단지 율법의 한 개체가 아닌 전체를 대표한다. 율법 조문 하나를 준수하고 못한 것은 단지 많은 율법조문 중 지극히 적은 일부분을 준수하고 못한 것이 아닌, 율법 전체를 준수했느냐 못했느냐의 문제이다.
누가 율법을 지켜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하면 그는 이미 율법 아래 들어가 정죄를 받은 것이기에, 그가 지키는 율법은 아무 의미가 없다. 외식(外飾)을 ‘회칠한 무덤(마 23:27)’‘대접의 겉만 깨끗케 함(마 23:25)’에 비유한 것은 율법주의자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율법의 완성’ 곧‘죄의 통(通)처리’ 없이 율법 조문 하나하나를 지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것에 대한 책망이다.
율법은 전체를 준수했을 때만 비로소 율법준수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율법’은 ‘통(whole, 通) 준수’든지 ‘통(whole, 通) 파괴’든지 이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25절)”는 말씀도 그 뜻이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대단한 것으로 여겨 그것을 준수하는 일에 목을 맸지만, 다른 작은 율법 하나를 준수하지 못했다면 그 대단한(?) 할례 준수도 무의미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와 달리 그리스도인들의 율법 준수는 유(有)의미하다. 이는 그것을 준수한 기저(a basis, 基底)가 ‘율법의 마침인 그리스도의 구속(롬 10:4)’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그의 의행(義行)이 불완전할지라도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의 구속(redemption, 救贖) 위에서 된 것이기에, 하나님께 ‘완전한 것’으로 열납 된다.
이와 관련해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됐다(롬 10:4)’는 말씀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전가 받은 ‘의(義)의 성격’을 규명해 준다.
그의 구속으로 죄인에게 부과된 ‘죄 삯 사망(롬 6:23)’을 지불해 율법을 완성시켰다는 뜻이지, 단지 우리를 대신해 그리스도가 율법 하나하나를 다 지켜 율법완성을 해 주었다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전가 받은 ‘의(義)’ 역시 당연히 ‘구속의 의(the righteousness through redemption)’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를 전가 받았다면 그의 ‘행위의 의(the righteousness through work)’를 따로 전가받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중 과세(double taxation, 二重課稅)이다.
◈위선이 불필요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죄로 타락하여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력으로 율법의 의(義)를 이룰 수 없으며, 자기가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된다고 믿는다.
이렇게 그가 그리스도의 의(義)만을 의지하니 자신의 ‘율법적인 의(의행, 義行)’을 드러내려거나 ‘자력으로 의롭게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율법’를 자랑하기보다는 ‘믿음’을 자랑하며, 기독교신앙을 권할 때도, ‘의인의 신앙’이 아닌 ‘죄인의 신앙’을 말한다.
그 결과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지나치게 윤리적인 기대를 하지 않도록 만든다. 나아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는 경우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아량의 마음을 갖게 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의롭게 보이려는 외식을 할 필요도 없게 되고, 하나님께 모욕이 돌아가지도 않게 한다. 이런 점에서 외식은 율법주의자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다.
서두에서 말한,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3-24)”는 말씀은 단순히 그들의 ‘비도덕적인 삶’에 대한 질타라기보다는 ‘율법주의’와 그로 인한 ‘그들의 외식’에 대한 질타라 함이 옳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