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上)
수학 교육 ‘공식’ 암기와 안전한 해법 비판하지만,
이런 종류의 영화 가장 안전한 흥행 ‘공식’만 따라
두 주인공 관계, <굿 윌 헌팅> 등 그대로 떠올라
교육 현실 비판, 과장되거나, 편향되거나, 단편적
◈수학과 창의성: 서사의 창의성 없이 수학의 창의성을 역설하는 모순
지난 3월 9일 개봉된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크게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한다. 우선 입시에 모든 것을 건 한국의 경쟁적 교육 현실의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하지 말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다음으로 남북 분단 현실이 한반도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는 상처와 고통을 외면하지 말자고 호소하고 있다.
메시지 자체는 무난하고, 요소요소 감동적인 장면들도 있어 나쁘지 않은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 현실 비판과 관련해 이 영화가 채택한 서사 전개 방식은, 아쉽게도 창의성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종류의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흥행 공식만 따라가려는 태도가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된 메시지는 증명 노력 없이 암기한 공식과 이전 시험에서 검증된 안전한 해법만을 가르쳐 빠르게 고득점을 얻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철학 없는 수학 교육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채택된 영화의 연출 방식은 이미 해외에서 여러 차례 검증된 안전한 흥행 공식에만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다.
이처럼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영화의 메시지와 서사 전개 태도가 서로 정확하게 모순의 관계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 점이 영화의 매력과 감동을 반감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구체적으로, 우선 서사의 핵심을 이루는 두 주인공 이학성(최민식 분)과 한지우(김동휘 분)의 관계 설정이 과도하게 식상하다. 이와 비슷한 류의 작품은 이미 해외에서 여러 차례 제작되고 흥행에 성공한 바 있다.
한편에는 자신의 분야에서 상당한 경력을 갖추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은둔자의 삶을 살아가는 연구자나 작가, 예술가가 있고, 그 상대편에는 재능이 있고 선량하지만 교육 시스템의 부조리로 인해 고통당하는 학생이 있다.
이런 양측의 만남을 다룬 영화들, 대표적으로 <굿 윌 헌팅>(1998)과 <파인딩 포레스터>(2000)의 설정들이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 그대로 채택되었다.
능력을 숨기고 학교의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직원 이학성과 재능 있는 학생 한지우의 만남이라는 설정은 <굿 윌 헌팅>으로부터, 그리고 한지우가 갖고 있던 수학 문제를 이학성이 우연하게 풀어내는 설정은 <파인딩 포레스터>로부터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넉넉치 않은 형편의 가정에서 어렵사리 명문 자사고에 입학했지만 친구들의 일탈에 결부된데다, 교사들의 편견과 오해로 인해 모든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고 퇴학 위기를 맞는 한지우의 위기 상황은 영화 <여인의 향기>(1992)에서 차용한 모티프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북한 출신의 뛰어난 수학 연구자 이학성이 한지우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방식, 즉 당장 성적을 올리는 교육이 아니라 수의 신비한 원리에 관심을 갖고 수리(數理)와 친해지도록 교육하는 방식은 여러 모로 일본의 수학관련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2006)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많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이렇게 해외에서 흥행한 작품들의 성공 공식을 하나씩 하나씩 가져와서 그럭저럭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되게 버무려 놓았다. 그래서 서사 전개 방식이 전반적으로 무난하고 익숙한 대신, 창의적인 임팩트는 미약한 교육현실 비판 영화로 남고 말았다.
◈수학과 경쟁: 입시 위주의 경쟁적 주입식 교육은 절대악인가?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가 전하는 것 같은 교육현실 비판 메시지가 한국 영화계에 본격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대 후반, 강우석 감독의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가 제작, 개봉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그 이전까지 한국 영화 속에서 공교육 현장은 나라의 미래를 밝게 만드는 숭고하고 활기찬 현장으로 주로 비춰졌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고교얄개> 시리즈로 대표되는 소위 ‘하이틴 영화’들이 고등학교 생활을 활기차고 희망적인 것으로 그려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당시는 미디어에 대한 감시가 엄중하던 개발독재 시대였다.
따라서 영화로 정부의 교육 정책을 비판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이에 따라 영화 속 교육현장이 그렇게 밝고 희망차게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입시 위주 주입식 교육과 권위주의적 학교 문화의 문제점을 질타하고 학생 인권을 높이려는 움직임이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한 것은 군사독재가 끝난 1988년 이후의 일이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이후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1990), <비트>(1997), <여고괴담>(1998), <친구>(2001), <말죽거리 잔혹사>(2004) 같은 영화들이 성적 스트레스, 교사들의 과도한 폭행, 학생들 사이의 잔혹한 폭력으로 얼룩진 암울한 공교육 현장을 그려냈다.
이렇게 한국 공교육의 획일적 교육방식과 교육 현장의 억압적 분위기에 대한 영화계의 시각이 크게 바뀌게 된 데는 학생들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한다는 명분을 내건 진보 계열 예술인들과 전교조 출신 교사들의 목소리가 크게 기여했다.
학습 현장에서 전체주의와 폭력에 의한 위압을 제거하려 노력한 이들의 움직임은 부분적이긴 하지만 학생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영화 속 교육 현실 비판은 여전히 과장되거나, 편향되거나, 단편적이다. 문제의 핵심을 짚지 못하고, 비현실적인 진보적 이상만 외치는 데 머무르고 있다.
공교육은 원천적으로 획일적일 수밖에 없다. 최소 수만에서 수십만의 학생들을 공정하게 평가할 현실적인 방법은 사실상 입시뿐이다. 개별화된 교육은 입시 시스템 안에서 경쟁하지 않아도 될 만한 재력과 시간적 여유를 갖춘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1948년 건국 이래 우리나라는 입시를 통해 자라나는 세대에게 공정한 기회의 평등을 제공해 왔다. 수백년 동안 서구 선진국들에 비해 까마득하게 뒤쳐져 버린 과학기술 수준, 그리고 식민 지배와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나라를 빠르게 일으킬 수 있었던 유일하게 현실적인 방편은 입시를 중심으로 한 규격화된 주입식 공교육이었다.
이런 교육 문화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 데는 한국의 유교적 과거제 전통, 미국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정착된 서구식 학교 교육체계, 그리고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요된 황국신민 주입식 교육제도가 복잡하게 관여되었다.
우리에게 있는 교육자원이 그것 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그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최선의 효율을 산출하려 했던 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국의 주입식 입시위주 교육방식이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우리가 불가피하게 선택하고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 덕분에 나라의 빠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입시 위주의 주입식 수학교육을 한 수학 천재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다.
사실 고도화된 수학 교육을 받고 철학 수준에 이르는 수학을 연구한 이들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이나 일본 식의 문제풀이 위주 수학 교육은 답답해 보일수밖에 없다.
원래 수학은 종교와 철학으로부터 출발했다. 고대 서구 기하학과 음악이론을 정립한 피타고라스는 수학자라기보다는 원래 철학을 깊이 연마한 종교 지도자였다. 그는 세계의 존재 원리가 신의 섭리로 이루어져 있고, 이 신의 섭리는 수리로 표현되고 치환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훗날 이런 믿음은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쳐, 근대에는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케플러, 뉴턴 등에게, 현대에는 베르그송, 러셀, 프레게, 화이트헤드 등에게 계승되어 현대 수학철학으로 발전되었다.
즉 수학은 원래 신의 섭리와 존재의 진리를 깊이 탐구하려 했던 종교철학자들의 중요한 사유 도구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수학 연구에는 종교적인 동기나 의미는 희박해졌지만, 존재의 진리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자 하는 심오한 수학철학적, 과학철학적 동기와 의미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런데 이런 수준의 수학 연구는 현실적으로 다음 두 가지 경우에만 가능하다. 첫째, 대학원 이상 수준에서의 수학 연구 과정에 참여하는 경우, 둘째, 천재 수학자 폰 노이만이나 오펜하이머처럼 아예 어려서부터 부유한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영재 교육을 받는 경우.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닌 이상 일반 고등학생 수준에서 ‘수와 친해지면서’, ‘공식이 아닌 원리를 파헤치며’, 수학을 학습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이처럼 일반적인 고등학생들이 접근하기 힘든 수학 접근법을 독려하면서 오늘날 입시 위주, 문제풀이 위주 경쟁에 치우친 수학 교육을 비판한다.
여기에는 과거 한국의 교육 정책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던 근대의 기독교적 교육방식과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독려된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공교육 정책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쟁을 독려하다 못해 인성마저 저버리는 교육 현장의 현실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은 분명 필요하다.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와 같이 오늘날 한국 교육 현실을 비판하는 영화들의 메시지는 대안이 없이, 오로지 비판 자체를 위한 비판으로 그치고 만다.
이러한 점은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의 설득력을 약화시키는 주된 요인이 된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박욱주
박욱주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