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함께 사는 자들 상호간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오늘날 우리들이 자기 지역이나 학력이나 가문이나 직장을 넘어서 진정한 이웃이 되라고 가르친다. 하나님 나라 시민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자들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가문, 혈연, 직장, 학연 등으로 맺어진 사람들만을 이웃을 삼고 서로 도와준다. 이에 대하여 예수가 베푸신 비유는 이러한 세상적 이웃 개념을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인 이웃 개념으로 변혁하신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오늘날 인종 문제로 갈등 속에 있는 미국과 유럽 사회에서 인종 갈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본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2016년 6월 23일 영국 국민들이 브렉시트(Brexit) 찬반 국민투표에서 이슬람 난민 받기를 거절하여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는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하여 국제사회가 실망을 느꼈다. 이에 반하여 독일 메르켈 총리는 일부 이슬람 난민들이 자행하는 범죄 때문에 정치적 지지도가 하락함에도 불구하고 백 만 명 이상의 이슬람 난민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메르켈의 정책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이하 FT)는 2015년 12월 메르켈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면서 "메르켈이 유로존의 금융 위기와 난민 문제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보다 대담한 독일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특히 FT는 메르켈 총리가 난민 수용 정책으로 100만 명이 넘는 난민들을 유럽 대륙에 받아들임으로써, 독일 통일과 유로화 탄생을 주도했던 자신의 정치적 멘토인 헬무트 콜 전 총리에 버금가는 유산을 남기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지구촌 시대에 오늘날 개인과 사회와 국가들은 자기만 살려고 하지 말고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돌보고 짐을 나누고 더불어 사는 정신을 가쳐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가르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정신이다.
9. 진정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다.
선한 목자 비유에서 예수는 자신이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참 목자라고 가르친다. 예수 외에 먼저 온자들은 절도요 강도요 삯꾼이다. 이들은 이리나 늑대가 오면 자기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도망한다. 그러나 참 목자는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묵숨을 바친다. 오늘날 우리 공동체나 정치현실에서 진정한 지도자를 만나기 어렵다. 오늘날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백성을 위하여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섬긴다.
지난 2016년 6월 브렉시트(Brexit)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영국 수상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권을 위하여 반대 세력을 무마하기 위하여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를 약속하고 이를 실시하여 영국을 유럽공동체에서 탈퇴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을 제공한 정치인이었다. “브렉시트 사안의 최대 딜레마는 캐머론이 상대당인 노동당을 지지해 달라고 하고 있다는 점이다. 캐머런 총리가 2015년 총선 공약으로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내세웠을 때 노동당은 거세게 반대했다. 캐머론은 2015년 5월 총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영국 국론을 분열 시켰고 전세계 경제까지 불안하게 만든 단초를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젊은 여성 진보 정치인까지 무고하게 희생됐다. 영국에서 콕스 의원은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는 국익이 걸린 문제를 국내 정치에 이용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영국 의회 민주주의 역사는 짧게 봐도 300년(1689년 권리장전)이 넘지만, 한순간 지도자의 그릇된 판단으로 국민적 혼란을 초래했다. 브렉시트라는 영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항을 자신의 집권을 위하여 표를 더 받게 집권 공약으로 넣는 것은 대중 영합주의자이지 진정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애국적인 동기에서 내걸었다면 그것은 경륜이 미천한 지도자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참된 지도자는 민족과 겨레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지도자다. 진정한 지도는 희생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륜이 있어야 한다. 안중근, 이봉창, 나석주, 이승만, 김구, 안창호 등 많은 독립투사들은 일제에 빼앗긴 민족의 주권을 되돌려 받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놓은 참된 지도자다. 이들은 거사 후 도망가거나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조선독립의 대의를 만천하에 공포하여 나라의 읽어버린 국격(國格)을 세운 경륜을 갖춘 지도자였다. 주기철, 손양원, 김관주, 조만식, 한상동, 장기려 등 기독교 지도자들도 해방 이후 예수의 선한 목자상을 그대로 실천한 우리 민족의 참된 목자였다.
10.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우리의 성품과 행실을 질적으로 높혀주는 변혁적 정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죄인을 벌주는 정의가 아니라 죄인을 의인으로 고양시키는 정의라는 것을 교훈한다. 예수는 오셔서 메시아적 잔치를 베설하고서는 의롭고 권세있고 부유한 자들이 아니라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주변적으로 취급된 인간들을 초대하신다. 하늘 나라의 문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는 교만한 자들에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스스로 죄많고 허물많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들어갈 수 없다고 여기는 겸손한 자들에게 열려 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의로운 행실과 선을 쌓은 업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죄와 허물의 탕감을 받은 자들에게 열려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정의란 누더기에 불과한 우리의 정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혈로 입혀주신 세마포(착한 행실)의 정의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가 바로 변혁적 정의다. 그분은 죄로 가득찬 우리의 존재를 의롭다 하시며 우리의 부패한 성품을 그분의 성품으로 변화시키시고 무더기 같은 성품을 그분의 거룩과 겸손과 온유의 성품으로 변화시키신다. 1974년 로잔(Lausanne)운동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실천 윤리로서 겸손(Humility), 정직(Integrity), 검소(Simplicity)를 제창하고 실천하고 있다. 샬롬나비 운동도 2017년 6월 10일 위크샵에서 이 실천윤리를 우리 교회와 사회에 보급하기로 결정하였다.
11. 하나님 나라는 현세에 대한 일에 대한 보상 내지 심판이며, 세상 나라와는 다른 질서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의 일에 대한 보상으로 각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부자는 부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서 연락(宴樂)하고 나사로 등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 그러나 나사로는 단지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 신앙을 본받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내세는 현세 질서의 연장이 아니라 전혀 다른 질서의 세계다. 세상의 부자나 권력자들 중 부와 권력을 잘못 사용한 자들은 내세에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거지나 가난한 자들 중 믿음을 가진 자들은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 속에서 쉰다고 가르친다. 세상 질서와 내세의 질서는 전혀 다른 질서다. 세상에서는 재물 가진자들, 권력 있는 자들이 잘 사나 내세에는 재물과 권력은 전혀 영생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비록 가난하고 권력이 없다고 할찌라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들은 영생의 복을 누린다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서로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하는 곳이며, 천국의 실재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간증한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예언자들의 선포에 의해서만 믿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천국이나 지옥 체험 같은 신비적인 체험 간증에 관해서 예수의 비유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 신구약 성경의 말씀만이 천국과 지옥에 관한 증언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12. 간청하고 소망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
간청하는 과부 비유는 불의한 재판관도 매일 와서 애소하는 과부의 간청에 번거러워 그 소원을 들어주는데 선하신 하늘 아버지께서는 택하신 자녀의 간청을 들어 주신다고 교훈한다. 하늘 나라의 논리란 하나님에게 드리는 그의 택한 자녀들의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에게 전적으로 매달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연민과 자비가 있다. 신자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눅 18:1). 몰트만이 그의 소망의 신학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특징적으로 피력한 바같이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자는 주어진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그것에서 고난받고, 그것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세계와의 불화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약속된 미래를 향해 쏘는 것은 모든 충족되지 못한 현재의 몸 속에서 가차 없이 준동하기 때문이다.”(J. Moltmann, Theologie der Hoffnung, Untersuchungen zur Begründung und zu den Konsequenzen einer christlichen Eschatologie, 1964, 17.)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떠한 어려운 처지에서도 절망할 수 없다. 우리가 ‘이제 끝이구나!’ 하며 직면하는 절망의 현실 한 가운데서도 그는 이미 소망의 근거를 마련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항상 우리에게 후히 주시는 소망과 인자와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3. 자칭 의인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들이 칭의를 받는다.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는 자기 행위를 내세우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교만한 자와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는 자, 두 부류 인간을 말한다. 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았으나 후자는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돌아 갔다. 하나님 나라도 이와 같다.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나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복하는 자는 죄와 허물의 사함을 받는다.
바리새인들은 본래는 하시딤 정신에서 유래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위하여 자신들이 성별된 삶을 살고자 한 종교인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본래의 정신이 퇴색되고 자신들이 다른 자들보다 의롭다는 교만의식이 지배하면서 율법의 정신에서 멀어지고 율법의 규례와 유전(遺傳)만을 강조하는 위선자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신자들 가운데 어떤 자들, 특히 신앙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자기 교만과 우월감에 젖어들어서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첫 사랑과 은혜의 감격에서 멀어져 버린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항상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성찰하고 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우리는 종말론적 심판 앞에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야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은 항상 이러한 종말론적 심판에 대한 두려운 마음의 태도로서 오늘 하루의 삶을 자신을 쳐복종시키고 돌보는 소명의 삶으로 살았다.(계속)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