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서 속량 받으라
‘구원을 받으라’는, 사실 ‘율법에서 속량(redemption, 구원)받으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는 죄의 심판이 율법으로 말미암았기에(롬 7:8), 죄인이 율법에서 속량을 받으면 심판에서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율법이 없다면 죄도 없고, 죄가 없으면 심판(죽음)도 없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
그러나 ‘율법에서 속량 받는다’는 것은 ‘율법을 무시한다’거나 ‘율법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고 율법이 그 사람과 무관해지지 않는다. 율법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어떻든 율법은 여전히 그를 상관하여 그에게 ‘심판’을 선언한다.
또 율법은 그 자체의 영원성(the eternity of law)으로 인해 절대 폐해지지 않는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심지어 ‘기독교의 대강령’인 ‘믿음’마저 그것을 폐하지 못한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율법을 폐하거나 무시하여 구원받았다’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믿음이 율법을 완성시켜 그것의 정죄를 받지 않게 됐다’는 뜻이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따라서 ‘율법을 폐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인 믿음’을 부정하는 일이다. ‘율법’이 없었다면 ‘믿음’도 없다. [그리고 ‘믿음’은 유일한 ‘율법의 완성이다.]
또한 ’율법을 폐하는 것‘은 ‘인간과 만물의 존재 근원’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이라는 ‘율법의 대강령’을 쫓아 그것들을 창조했기(사 43:7, 계 4:11)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율법을 폐하는 것)은 [‘그 모든 것들’과 또한] ‘그것들을 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율법은 피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기에, 죄인은 반드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그것에서 속량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이 항상 그를 추격하며 그에게 쉬지 않고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인간이 율법을 어긴 대가는 ‘사망(롬 6:23)’이며, 율법에서 속량 받는 길은 오직 ‘사망을 지불하는 길’ 뿐이다. ‘율법의 속성’은 ‘공의’이기에 그것은 ‘댓가’없이 뭔가를 해주는 일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죄인에겐 ‘죄삯(사망) 지불’이 불가능하게 됐다는 점이다. 곧, 그가 범죄하자마자 ‘죄값(사망)을 지불할 자격’을 상실하여, 그의 죽음이 ‘죄삯’이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율법에 대한 죄인의 딜렘마이다.
혹자는 ‘사는 것에 자격(the qualification to live)’이 필요하지, ‘죽는데 무슨 자격(the qualification to die) 운운 하는가’라고 할지 모른다. (사실 이런 가치관은 기독교 외는 없다. 모든 종교는 ‘사는 자격’을 요구한다.) ‘완전한 하나님’의 속성의 표현인 ‘율법’은 죄인에게 오직 ‘점 없고 흠 없는 거룩한 죽음(벧전 1:19)’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의로운 행위’에서 ‘의로운 죽음’으로
타락하기 전의 아담(Adam)이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받았던 것’은 율법에 대한 완전한 복종(창 2:17), 곧 ‘의로운 삶(righteous living)’이었다. 그러나 타락 후 인간이 ‘하나님(율법)으로부터 요구받는 것’은 ‘의로운 죽음(righteous death, 롬 6:23)’이다. 죄로 인한 인간의 무능을 대변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타락한 죄인임을 망각하고 마치 자신이 ‘무죄자(無罪者)인 것처럼 ‘의로운 삶’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고 한다.
이러한 그들의 오해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목적까지 왜곡시켰다. 곧 그가 ‘의로운 죽음’을 죽기 위해서가 아닌, ‘의로운 삶’을 살기위해 오신 것처럼 곡해시켰다. 그가 오신 목적이 그들이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대신 지켜 율법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성취된다. 성경이 ‘택자 구원’과 관련해 오직 ‘그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택자를 위한 그의 ‘의행(義行)’도 ‘도덕적인 것’이 아닌 ‘죽음’을 의미했다.
많은 사람을 의인으로 만든 ‘한 사람 그리스도의 순종’도‘아담과 우리의 불순종을 상쇄할 만한 어떤 의행(義行)’이 아닌 ‘그들 불순종의 댓가로서의 그의 죽음’이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내용 역시 ‘십자가 죽음’이었다. 그가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17).”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가 주시는 잔을 받아 마시겠다(마 26:39)”고 하신 것도 ‘십자가 죽음’이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율법에서 속량하신 것이 그의 ‘율법적 의행(義行)’을 통해서가 아닌, 그의 ‘의로운 죽음’을 통해서임을 시사한다.
혹자는 ‘아담의 원죄를 비롯해 우리가 못 지킨 율법(law that us has'nt keep up)’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형벌’을 받아내심으로, ‘우리가 앞으로 지켜야 할 율법(law that us will keep up)’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행(義行)’으로 율법을 성취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이중과세(double taxation, 二重課稅)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단번의 죽음을 통해 ‘죄삯 사망’을 지불하신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를 다 포함했다. 이 외에 또 다른 그리스도의 ‘의행’을 첨가할 것이 없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이는 이중과세가 되어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완전히 속량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이처럼 율법의 요구 앞에 내어놓을 것이 ‘그의 의로운 죽음’뿐일진대(그의 의행마저도 제외될진대), 감히 죄인이 그의 더러운 ‘의행(義行)’을 그 앞에 내어놓으려고 하는 것은 후한무치이다. 그가 그러한 시도를 하자마자 율법이 그를 정죄해 버릴 것이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죄인이 율법에서 속량 받는 유일한 길은 우리 대신 ‘의로운 죽음’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롬 10:4, 갈 3:13)의 의(義)를 덧입는 길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율법에서 속량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으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