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下)
수학과 음악, 창조섭리와 사역 표현하기에 적합
세속화와 무신론 영향으로, 본래 목적 잃어버려
영화, 신앙 배제하려다 식상한 공교육 비판으로
수학, 지적 설계자의 존재 어렴풋이 믿어지게 해
◈수학과 코스모스: 수학과 음악에 담긴 신비로운 섭리의 요소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 탈북한 수학 천재 이학성(최민식 분)은 수포자 고등학생 한지우(김동휘 분)에게 수와 도형의 신기한 원리들을 보여주며 수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준다.
수학도 고도화되면 카오스의 영역으로 넘어가지만, 일단 수학의 기본적인 인상은 코스모스, 즉 질서이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 원주율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원주율 파이는 소수점 아래로 숫자들이 무질서하게 이어지지만, 이를 음표로 치환하면 조화로운 음악 선율이 된다.
수학, 음악,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신기한 질서에 대한 발견은 이미 주전 6세기경, 고대 그리스에서 피타고라스에 의해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통상 피타고라스를 대단한 고대 수학자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피타고라스는 신의 섭리가 수와 음계 속의 질서로 표현된다는 믿음을 가졌던 종교지도자이자 철학자였다.
그는 윤회를 통한 영혼의 정화를 믿었고, 이렇게 영혼이 정화되는 삶을 위해서 신의 조화로운 질서에 철저하게 부합하는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자연의 현상들 가운데 숨은 수적 질서들을 찾아내고, 또 현악기의 줄 길이 비율에 따른 음의 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해서 서구 최초로 조화로운 음률을 조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종교사상은 주전 4세기경까지도 고대 그리스 식민지 전역에 널리 영향을 주었는데 가장 결정적으로 젊은 시절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한동안 철학과 기하학을 연구했다.
이에 플라톤은 그의 저서 <티마이오스>에서 자신의 이데아론에 수학적 원리를 접목한 가르침을 전하기도 했다. 플라톤이 세운 종합대학 아카데미아의 정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넘어오지 말라.”
피타고라스에서 플라톤으로 이어진, 신의 섭리가 수학과 음악에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사상은 훗날 주후 4-5세기경 신플라톤주의를 활용해서 신학의 안정적인 체계화를 이뤄낸 어거스틴에 의해 기독교 신학 안에 유입된다.
어거스틴은 <고백록>(Confessionum)과 <음악론>(De musica)에서 수학과 음악이 비록 성경의 진리만큼 하나님에 대해 명료하게 계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 현상 너머에 기묘할 정도로 체계적인 형이상학적 질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유익한 학문이라고 평가했다.
수학과 음악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에 근접한 학문이라고 여겼던 풍조는 근대 서구 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수학자 데카르트, 파스칼,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모두 각기 고유한 접근방식을 통해 세계를 운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좀 더 깊이 알아보고자 노력했다. 뉴턴은 스스로를 물리학자나 수학자라기보다는 자연철학 혹은 자연신학자라고 자처하며 수학과 하나님의 섭리의 직접적 연관성을 강조했다.
근대 서구 음악계 역시 만물에 두루 작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권능과 섭리를 표현하기 위해 힘썼다. 물론 신성로마제국의 가톨릭 교회나 영국 왕실과 결탁한 영국 국교회 등이 음악인들의 재정지원에 큰 지분을 담당하고 있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당시 최고 수준의 음악인들은 음악이 하나님의 섭리와 사역을 표현하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 점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이다.
◈수학과 섭리: 결국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접근할 수밖에 없는 수학과 음악
이런 역사적, 사상적 배경 때문에 서구에서 수학과 음악은 대개 최소 중산층 이상 수준 가문 출신 인재들이 탐구할 수 있는 학문 혹은 예술활동으로 인식되었다. 빈민들은 아예 이쪽 영역에 손도 댈 생각을 하지 못했고, 서민층에서 뜻을 품은 이들은 귀족가나 유력가문의 지원을 받아서, 또는 그들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과외교사로 일하면서 힘겹게 수학이나 음악을 탐구하고 향유할 수 있었다.
음악의 경우 통속적인 서민들 음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묘한 창조섭리와 사역을 표현하기에 적합할 만큼 고도의 음악적 기술을 활용하는 일은 멘델스존, 하이든,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등 당대 최고급 음악교육을 받은 이들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수학과 음악이 산업과 경제 발전이라는 실용적 목적을 위해서 주로 활용되고, 또한 세속화와 무신론의 영향까지 받아 하나님의 섭리에 접근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상당부분 잃어버린 상태이다.
하지만 오늘날도 수학이든 음악이든 고도화된 영역으로 들어가면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섭리 및 영감에 대한 물음에 직면하게 되고, 따라서 자연철학 혹은 자연신학의 지경에 발을 걸치게 된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속에서 이학성이 풀어냈다는 20세기, 21세기 수학계의 최대 난제, 리만 가설의 리만제타함수의 경우 기묘하게도 양자역학에서 입자의 에너지 분포에 관한 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리만 가설은 수학계에서, 양자역학의 수식은 물리학계에서 원래 서로 따로 연구하던 것인데, 우연하게 서로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때문에 리만 가설을 입증하면 양자의 영역에서 만물의 존재 원리를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기대감으로 수많은 수학자, 물리학자들이 리만 가설 증명에 힘써 왔다. 물론 영화 속 내용과 달리 리만 가설은 여전히 완전하게 입증되지 못한 수학계 최대의 난제로 남아 있다.
어쨌든 수학은 고도화된 영역으로 들어가면 자연철학이나 형이상학에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서구 사상사 속에서 종교성 및 신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왔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작중 북한 김일성 대학 출신 최고 수학천재 이학성이 왜 북한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말해준다.
이학성은 북한에 학문의 자유가 없음에 절망하고 탈북을 단행한 인물이다. 유물론에 입각한 무신론에 편중된 북한에서 수학이란 오로지 군사무기 개발이나 경제력 개발의 도구로만 사용되는 ‘기술’에 불과할 뿐이다. 거기에서는 수학에 어떠한 철학도 용납되지 않는다. 만일 용납된다면 수령 형상을 강조하는 주체사상뿐일 것이다.
수학의 탐구에 자유가 없다는 것은 곧 수학에서 신비의 영역, 형이상학의 영역,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을 지워버리는 억압적인 행태가 만연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수학은 애초 태생적으로 단순한 계산 기술로만 남을 수 없는 학문이다. 수학을 통해 만물을 다스리는 조화로운 질서를 깊이 탐구해 들어가면, 세계를 창조하고 질서를 부여한 지적 설계자의 존재를 어렴풋이 믿게 되는 단계를 반드시 거치게 된다.
전편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특별한 대안이 없는 한국의 수학교육 비판을 감행한다는 점에서 메시지에 큰 약점을 보인다. 이것 역시 기본적으로는 수학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의 영역을 배제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수학의 신비롭고 흥미로운 요소를 깨달을 수 있게 해주자는 메시지를 담아내려 하지만, 정작 그 근본을 알지 못해 한국의 주입식 공교육에 대한 식상한 비판으로 빠지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많은 이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던 수학에 담긴 신비로운 요소들을 일정부분 소개하여, 수학의 종교적·형이상학적 성격을 편린이나마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결국 많은 학생들이 수학을 포기하는 이유는, 오로지 입시를 위해 ‘괴롭게’ 익혀야만 하는 기술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공교육의 열악함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그 근원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수학에서 인간의 종교성 및 신앙에 맞닿는 신비와 형이상학의 영역을 배제해 버린 문제가 발견된다.
어거스틴, 라이프니츠, 뉴턴 등이 지적한 것처럼, 수학은 하나님의 섭리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수학에 대한 흥미는 신비로움에 대한 흥미를 통해 되살릴 수 있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이 점을 간접적으로나마 암시해 준다는 점에서 기독교적으로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한다고 볼 수 있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