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 설교] 무한한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드리며
일시: 2022년 3월 27일
장소: 일원동 일원교회
본문: 히브리서 12장 1-2절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사신 신앙의 선배님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4절), “믿음으로 에녹은”(5), “믿음으로 노아는”(7), “믿음으로 아브라함은”(8), 그리고 이삭과 야곱과 사라와 요셉과 모세와 라합과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선지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히 12장 1절과 2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사실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면서 배우려고 하는 것은 아주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나를 만드신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며”라는 제목으로 저의 삶에 대한 간증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한평생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이고 게으르고 나태한 온갖 죄와 허물로 가득한 죄인 중의 죄인으로 살아왔는데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심부름꾼으로 살아오고 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심부름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된 것이지만 또한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를 만드신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며” 라는 제목으로 부족한 저에게 귀중한 신앙의 유산들을 물려주신 신앙의 선배님들에 대한 감사와 사랑과 존경의 이야기들을 간단하게 줄여서 하려고 합니다.
1.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
첫째로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는 목회의 길과 핍박과 고난과 순교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부족한 저에게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순교 신앙을 물려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는 처음에는 북한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9년 동안 목회하시고 그 다음에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2년 동안 목회를 하셨는데 일본 시대에는 신의주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자주 감옥에 잡혀 가시는 고난을 당하셨고 공산주의 시대에는 평양에서 공산 정치를 반대한다고 자주 감옥에 잡혀 가시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저는 죽도록 충성하는 목회의 길과 핍박과 고난과 순교의 길로 걸어가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함께 “핍박과 고난과 순”의 신앙을 조금씩 조금씩 물려 받아서 몸에 지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11살 때인 1948년 7월에 감옥에 계시는 아버지를 찾아가서 “아버지! 여기서는 주일을 성수하며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저 남쪽으로 갈래요” 라고 말씀했을 때 아버지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던 어머니에게 “저 남쪽으로 갈래요” 라고 했을 때, 어머니는 울면서 “그러면 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어머니로부터는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의 영성을 물려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1948년 8월 어느 날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서 뛰어 넘어서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함께 오던 어른들은 “손 들고 서”라는 공산 군인들에게 붙잡혔는데, 저는 혼자서 언덕을 넘고 파 밭을 달리고 목에 차는 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11살 때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서 뛰어 넘은 사건은 저의 삶과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그 때부터 평생토록 “영 몰라 통 몰라”를 몸에 지니고, “모험심과 담력”을 몸에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가는” “막가파”로 달려가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평생 감옥과 순교의 길로 걸어가신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으로부터는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순교 신앙”을 물려받게 되었고 저를 너무너무 순수하게 사랑하시던 어머니로부터는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의 신앙”을 물려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2.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주일학교 선생님들
둘째로 제가 평양에 있을 때 평양 서문밖교회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로부터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순교 신앙”을 계속해서 분명하게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은 저에게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순교 신앙”이 가장 귀중한 신앙이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저는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주일을 하루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성수했고 새벽 기도에도 빠지지 않았고 순교 신앙을 가장 귀중한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 평양 제 오 인민학교에 2년 동안 다녔는데 일요일에 학교에 오지 않는다고 2년 동안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서고 정학을 당하게 되었는데 저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은 나중에 모두 월남해서 목회 사역을 하셨는데, 저는 남한에서도 반갑게 만나 계속해서 세 분 목사님들의 사랑과 도움과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한 작은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하시는 이인복 목사님의 교회에 다니면서 교사의 일과 전도의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또한 명선성 목사님을 모시고 38선 근처에 가서 북한을 바라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3. 이성봉 목사님
셋째로 제가 11살 때인 1948년 8월 주일 성수의 신앙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서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이별의 슬픔과 아름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감사를 지니고 살게 되었는데 2년 후인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서 대구로 가서 3년 동안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무디 라고 불리시는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12번 참석하면서 너무나 큰 은혜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공부는 둘째 셋째였고 신앙생활과 은혜 사모가 첫째였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설교는 중학생인 저에게 너무 재미가 있었고 너무 감동적이었고 너무 은혜로웠습니다. 저는 늘 앞 자리에 앉아서 이성봉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곤 했는데, 부흥회 도중에 이성봉 목사님께서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는 성경 구절을 미리 암송했다가 성경을 찾지도 않고 즉시 암송하므로 이성봉 목사님의 칭찬을 받곤 했습니다.
사실 저는 이성봉 목사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을 모두 그대로 했습니다. 새벽 기도를 하라고 하면 새벽 기도를 열심히 했고, 성경을 암송하라고 하면 성경을 열심히 암송했고, 회개하라고 하면 회개를 열심히 했고, 은혜를 사모하라고 하면 은혜를 열심히 사모했고, 전도를 하라고 하면 전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하고 토요일 새벽에는 이성봉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곤 했는데,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하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묻지도 않으시고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거지” 라고 하시면서 기도를 해주시곤 했습니다. 아마 12번 정도 안수기도를 받은 것 같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와 축복이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을 너무너무 좋아했고 너무너무 존경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성봉 목사님의 셋째 딸인 이의숙 씨와 친하게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강변교회에서 목회할 때 제가 너무너무 존경하던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 주광조 장로님과 너무너무 존경하던 손양원 목사님의 딸 손동희 권사님과 너무너무 존경하던 이성봉 목사님의 딸 이의숙 권사님 세 분을 함께 초청해서 간증 집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4. 김치선 목사님
넷째로 제가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에 서울 창동교회와 대창교회에 다니면서 한국교회의 예레미아 라고 불리시던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눈물의 회개와 은혜 사모와 기도와 전도와 헌신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치선 목사님께서는 새벽 기도회 때마다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사” 찬송을 부르시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시곤 하셨는데, 저는 새벽기도 후 남산으로 올라가서 어느 숲 속에서 30여 분 이상 더 기도하고 내려오곤 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산 기도회에는 삼각산 관악산은 물론 대구 주암산까지 가곤 했습니다. 대구 주암산 기도회 때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저는 너무나 깊은 감동을 받고 울고 또 울고 또 운 일도 있었습니다. “피 흘려 사신 교회”라는 말씀에 어떻게 하나님 피를 흘리셔서 교회를 사셨다는 말인가를 생각하면서 너무 감사하며 감격해 울었고 “늘 사랑합니다”라는 말씀에 나는 늘 사랑하지 못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너무 죄송하고 부끄러워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김치선 목사님께서는 교회에서 새벽기도회 때마다 2만 8천여 동내에 우물을 파게 대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시곤 했는데 저는 김치선 목사님의 기도와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고 3때와 대 1때 토요일과 주일에 왕십리 들판에 나가서 찬송을 부르고 전도를 하면서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불러모으고 천막 교회를 세우고 목회사역을 한 일도 있었는데 어린이들 60여명과 어른들 40여몀이 모이곤 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5. 손양원 목사님
다섯째로 저는 손양원 목사님으로부터 순수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함께 희생적인 사랑과 섬김과 순교 신앙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서울고등학교 2학년 학생일 때 여름 어느 날 남대문 네거리에 있는 기독교 서점에서 「사랑의 원자탄」 이란 책을 사서 들고, 제가 새벽기도 후에 날마다 올라가서 기도하곤 하던 남산 어느 숲 속으로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랑의 원자탄」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나병에 걸려있는 아이들과 함께 산으로 소풍을 갔는데 점심을 먹는 시간에 아이들이 자기들을 너무 많이 사랑하시는 손양원 목사님께서 나병에 걸릴까 자기들끼리 따로 앉아서 점심을 먹는데, 손양원 목사님께서 아이들에게 가까이 와서 아이들의 점심을 빼앗아 먹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하면서 저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나환자들의 병든 몸을 입으로 빨아주면서까지 사랑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양 아들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하면서 저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후부터 손양원 목사님은 제가 제일 사랑하고 제일 존경하고 닮고 싶은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나환자들 사랑의 노래를 다음과 같이 지어서 부르시곤 했습니다. “주여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보다는 더 사랑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을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 해 일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맘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애양원 나환자들에 대한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은 노래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딸 손동희 권사는 나환자들에 대한 아버지의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나환자들과 함께 보냈다. 틈만 나면 집집마다 심방을 다니는 것이 일이었다. 당연히 가족들에게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우리 형제들은 늘 가슴 한 구석이 빈 듯한 허전함을 느끼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불평을 늘어 놓거나 원망한 적이 없었다.
보통의 나환자들보다 훨씬 병이 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14호실이다. 아버지는 14호실 환자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더욱 많이 쏟았다. 환자들이 거부하는데도 그들의 손을 잡고 식사를 같이 하곤 했다. 아버지는 그들의 피고름 나는 손을 거침없이 부여잡고 장시간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나병의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며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의 나병 감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아버지였다.”
손양원 목사님은 한국의 프랜시스요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이렇게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충만하신 손양원 목사님을 부족한 우리들의 선배님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너무 크고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6. 한경직 목사님
여섯째로 한경직 목사님은 제가 태어나서부터 한평생 살아오는 동안 저를 너무 많이 사랑해 주셨고 가르쳐 주셨고 도와 주신 너무나 귀중한 신앙과 삶의 스승님이십니다.
제가 한 살 때인 1938년부터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부 목사님으로 목회를 하셨는데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한 살 난 애기인 저를 안아 주시면서 사랑해 주셨습니다.
저는 1살 때부터 평생 한경직 목사님의 친밀한 사랑과 가르침을 받으면서 살았는데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기도와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섬김과 가난과 고난과 화해와 평화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시면서부터 월남 후 영락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동안에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사람들을 정성껏 사랑으로 돌아보시는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래서 보린원,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 집, 재가노인복지 상담소등을 세우셨습니다.
저는 11살 때 월남한 다음 한경직 목사님께서 돌아가신 2000년 4월 19일까지 한평생 한경직 목사님의 사랑과 가르침과 도움을 받으면서 살았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제가 고 3때 좋은 목사님이 되려면 대학에 가서 무엇을 전공하면 좋으냐고 한경직 목사님께 여쭈었을 때, 역사를 전공하면 좋다고 말씀해서 제가 역사를 전공하기 위해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하여 서양사를 전공하게 되었는데, 너무너무 잘 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 했을 때 한경직 목사님의 추천서를 받기도 했습니다. 12년 동안 유학생활을 마치고 1974년에 귀국한 다음에야말로 저는 한경직 목사님의 사랑과 도움과 격려를 많이 받았습니다.
1984년 6월 영락교회와 뚝섬공원에서 모인 세계기도성회의 실무를 제가 맡았는데 한경직 목사님께서 전적으로 후원해 주셨습니다. 한국에서 여덟 번의 케직 사경회가 열렸는데 한경직 목사님께서 박윤선 목사님과 함께 세 번 주 강사로 참석해 주셨습니다.
제가 주일 성수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일 때 한경직 목사님께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면서 명동에 나오셔서 의자에 앉아 서명을 받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기독교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템플턴 상을 받은 즉시 상금의 전부를 북한 동포들 돕기에 사용하도록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지니셨던 귀중한 삶과 사역의 모습을 간단하게 지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예수님 닮은 “온유와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또한 “사랑과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목회 사역의 시작부터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는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 프랜시스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너무 귀중하고 너무너무 아름다운 삶과 사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7. 조동진 목사님
일곱째로 저는 조동진 목사님으로부터 목회와 선교 사역에 헌신할 수 있는 계기를 체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11년 동안 하고 있을 때 뉴욕을 방문하신 조동진 목사님께서 저를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조동진 목사님께서는 제가 유학을 마친 후 후암교회에 교육 목사로 오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리고 풀러신학교 선교신학원에 가서 선교학을 연구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본래 남의 말을 잘 듣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조동진 목사님의 권면으로 1974년 1월 풀러신학교 선교신학원에 가서 리써치 어쏘우시에이트로 지내며 선교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평생 연구한 역사 신학이 선교 신학으로 이어지고 보충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역사 신학과 목회 사역을 선교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후암교회에서 5년 동안 교육 목회를 하면서 목회 사역의 귀중성을 체험하게 되었고, 조동진 목사님과 국내외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선교 사역의 귀중성을 체험하게 되었고, 총신과 합신에서 역사 신학과 함께 선교신학 강의를 하면서 역사 신학과 선교신학의 귀중성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8. 정진경 목사님
여덟째로 저는 정진경 목사님으로부터 온유와 겸손과 포용과 협력과 따뜻함과 격려와 칭찬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진경 목사님께서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를 누구보다도 너무너무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거의 모든 선교 운동과 연합 운동을 정진경 목사님과 함께 했습니다.
저는 정진경 목사님과 한국복음주의협의회와 아시아복음주의협의회와 소련선교회 등의 일로 아시아와 세계 곳곳을 수 없이 많이 함께 다녔는데, 정진경 목사님은 함께 다니기에 너무 편한 분이셨고 소박하시고 따뜻하시고 친절하신 분이셨습니다.
백두산을 비롯한 중국 일본 러시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홍콩 등 세계의 수 많은 곳을 정진경 목사님과 함께 여행하면서 저는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모릅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하나님과 한국교회와 아시아 교회와 세계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신 분이셨고, 연합과 협력을 도모하신 분이셨고, 바른 신앙을 펴 나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분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온 것이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한 마디 더 하면 오래 전에 KBS 방송에서 새해 특별 프로그램으로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란 제목의 순서를 진행했는데, 어느 분이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정진경 목사님이라고 해서 대화를 주고 받았는데, 정진경 목사님에게 정 목사님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김명혁 목사님이라고 대답을 해서 제가 충격을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9. 박윤선 목사님
아홉째로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저의 삶에 지대한 영양을 미치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12년 동안의 유학생활 후 귀국해서 총신대의 교수로 봉직하고 있던 1979년 3월, 박윤선 목사님께서 총신대 신학원장으로 부임하셨습니다. 이후 저는 총신대에서 1년 7개월 동안 그리고 합동신학교에서 7년 7개월 동안 박윤선 목사님을 가까이 모시고 함께 일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특별한 은혜와 축복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저는 언제나 박윤선 목사님과 상의를 하곤 했습니다. 박 목사님도 저를 퍽 좋아하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시간에 상관없이 저에게 전화를 거시고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때로는 질문도 하셨고 때로는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마” 라고 하시면서도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박 목사님의 입장에 동조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인간적으로는 소년처럼 단순하고 순박하고 정다웠고 신앙적으로는 하나님만 아시는 분이셨고 하나님께만 붙잡혀 사신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주여, 주여” 라고 고백하시면서 주님만 의지하기고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윤선 목사님의 삶은 자연히 “기도”에 전념하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박 목사님은 기도를 생활화하신 분이셨습니다. 기도를 쉽게 하신 분이 아니라 수고스럽게 하신 분이셨습니다.
총신에 계실 때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에 사셨는데, 매일 새벽 택시를 타고 총신에 오셔서 뒷산에 올라가 2,3시간씩 기도하시는 모습을 저는 한 6개 월 동안 옆에서 목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박 목사님을 흉내 내며 새벽에 총신 뒷산에 올라가서 2 개월 동안 기도하곤 했습니다.
1979년도 총신에 학생 소요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도 박윤선 목사님은 기도로 일관하셨습니다. 학생들이 이사회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서 이사들과 교수들의 자동차를 뒤집어엎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의 책임자이신 박 목사님께서 학생 대표들을 불러 타이르거나 사태 수습을 협의하시는 대신 특별 기도회를 선포하시고는 밤마다 강당에서 기도회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기도회의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이 저마다 일어나서 “내가 누구의 자동차를 뒤집어 엎었습니다!” 라고 소리를 지르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 일관의 박 목사님 삶의 자세를 지금 돌이켜 볼 때, “바로 그것이다!”라고 새롭게 감탄하며 저는 지금 그 길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저는 박윤선 목사님께서 마지막 1주일간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계실 때 매일 박 목사님을 찾아가서 뵙곤 했는데, 그때야말로 박 목사님께서 기도로 일관하신 기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산에 가서 기도하다가 죽고 싶다”고 고백하시기도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소위 박 목사의 의를 제해 달라” 라고 호소하며 기도하시기도 했습니다. 박 목사님은 결국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으며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기도로 일관된 귀중한 삶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윤선 목사님의 삶은 또한 평생토록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연구하는 주경 신학자의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박 목사님은 평생을 신·구약 성경 66권의 주석 집필에 바쳤고 평생을 성경을 가르치는데 바쳤습니다.
사실 저는 평생 박 목사님의 주석을 애독하고 있는데,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른 주석들을 거의 찾아보지 않지만 오직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만 주로 찾아보곤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에게 있어 성경 말씀은 양식이요 생명이요 기쁨이요 보화요 등이요 빛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주석과 설교에는 항상 새로운 영감과 통찰력이 나타났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이 무엇임을 자신의 삶으로 나타내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윤선 목사님의 삶은 또한 “온유와 겸손과 친밀함과 진솔함과 따뜻함의 삶” 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항상 진솔하고 따뜻한 소년의 미소가 깃들어 있었고 가식이나 꾸밈을 모르는 진실이 풍기고 있었습니다.
성역 50년 기념 논총을 증정받은 박 목사님은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 라고 진솔하게 고백을 했고, 임종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오해하는 소위 박 목사의 의를 모두 지워달라”고 처절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호소하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종종 저의 손을 꼭 붙잡고 격려와 위로와 훈계의 말씀을 진솔하게 하시곤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온유와 겸손과 친밀함과 진솔함과 따뜻함을 몸에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함께 있기 너무 편한 분이셨습니다.
한 마디 더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인간 관계나 교파 또는 문화적 관계에 있어 폭넓은 포용적 이해와 시야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기도와 말씀과 은혜를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통합측 인사들은 물론 루터파 인사들까지 교파를 초월해서 친밀하게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여성 사역에 있어서도 포용적인고 개방적인 입장을 취히셨는데 장신대의 주선애 교수를 초청해서 강의를 하게 하셨고, 이동주 교수를 초청해서 강의와 설교를 하게 하셨습니다. 부족한 제게 박윤선 목사님을 가장 존경하고 배우고 싶은 신앙의 스승님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얼마나 귀중하고 놀라운지 모릅니다.
10. 방지일 목사님
열째로 저는 방지일 목사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많이 받으면서, 방지일 목사님으로부터 순수함과 섬세함과 정확함과 따뜻함과 사랑과 섬김과 눈물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 특별한 사랑의 손길을 따뜻하게 펴시며 진솔한 말씀들을 해 주시곤 했습니다. “김 목사, 점심 대접할게” 라는 송구한 말씀을 수십 번 하셨고, 제가 달려가면 일산으로 강화도로 경기도로 서울 곳곳으로 저를 데리고 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 주시곤 했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계시는 생각들을 저에게 진솔하고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시곤 했습니다.
저는 방지일 목사님을 모시고 중남미 도미니카로, 모스크바로, 몽골로, 태국으로 다니면서 선교대회에 참석하곤 했는데, 선교사들과 현지인들은 물론 저는 너무너무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하신 귀중한 말씀들이 너무너무 많은데 한 가지만 소개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리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나 혼자 있을 때면 우는 때가 많아요. 깊은 밤중에 일어나 우는 때도 있고 혼자 길을 걸으면서 우는 때도 적지 않아요. 어린 아이는 잘 울어요. 배가 고파도 울고, 보고 싶어도 울고, 기저귀가 젖어도 울어요. 어린 아이는 우는 방법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의미에서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해요.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고 통달하려고 하다 보니 울지 않게 된 것이에요. 기도의 최고봉은 눈물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한테서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방지일 목사님과 친밀한 교제의 시간들을 가진 것이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시간이 부족해서 방지일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줄입니다.
설교를 마무리하며
이것으로 오늘 “나를 만드신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며”라는 제목의 간증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사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한평생을 온갖 죄와 허물로 가득한 죄인 중의 죄인으로 살아왔는데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심부름꾼으로 살아오고 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심부름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된 것이지만 또한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귀중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과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과 한국교회의 무디 이성봉 목사님과 한국교회의 예레미아 김치선 목사님과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과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섬김과 가난과 고난과 화해와 평화의 목회자 한경직 목사님과 목회와 선교 사역에 헌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신 조동진 목사님과 온유와 겸손과 포용과 협력과 따뜻함과 격려와 칭찬의 목회자 정진경 목사님과 기도와 말씀, 소박함과 진솔함, 착함과 따뜻함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과 순수함과 섬세함과 정확함과 따뜻함과 사랑과 섬김과 눈물의 목회자 방지일 목사님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멘! 아멘! 아멘!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복협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