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메이의 새빨간 비밀> (上)
중국 전통 종교문화에 대한 서양의 호기심 잘 반영
서양인 관객들에게 호기심, 동양계에게는 공감을
주인공 레서판다의 영혼 내보내지 않고 받아들여
자연의 기운 받아들여 존재 지속 신선도 사상 반영
◈서양에 자리잡은 중국인: 보수적인 중국식 가풍 속 서양 생활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지난 3월 OTT 서비스 업체 디즈니 플러스가 단독으로 공개한 새 픽사 애니메이션이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2002년, 공간적 배경은 캐나다 토론토로, 한 중국계 가문 출신 소녀 메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막 사춘기로 접어든 메이는 친구들과의 친밀한 관계에 몰입하고 이성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넘쳐나는 활발한 소녀이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은 보수적인 중국계 이민자 가문으로, 중국식 사당(祠堂)을 운영하며 수입을 얻는다. 집안에서 어머니 밍은 딸 메이와 함께 수시로 조상들에게 향을 올리며 제사를 드린다.
메이는 학업과 효도, 그리고 조상숭배를 강조하는 이런 보수적인 중국식 가풍 속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성품의 소녀로 성장하기 위해 분투한다.
메이의 어머니 밍은 메이가 서구 식의 자유분방하고 개인주의적인 소녀로 성장하는 것이 못마땅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여, 메이의 행동을 자주 규제하며 과잉 보호한다. 이것은 서구 사람들이 보는 전형적인 동양의 부모상이기도 하다.
서사의 본격적인 전개는 메이가 빨간 털을 가진 커다란 레서판다(Red panda)로 변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는 메이 가문 여자들의 공통적인 특성인데, 크게 흥분하거나 분노해서 감정의 동요를 억누르지 못하면 커다랗고 빨간 레서판다로 변하게 된다. 이 괴이한 현상은 메이 집안의 모계 쪽 선조가 레서판다의 혼령을 몸에 받아들이면서부터 나타난 일로 설명된다.
변신한 상태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려면 주술적인 봉인 의식을 행해야 하는데, 메이는 봉인 의식을 거부하고 레서판다의 모습으로 친구들과 어울리고, 친구들은 그런 그녀를 환영하며 오히려 잘 어울린다. 이를 통해 메이는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레서판다 변신 상태를 스스로 통제하는 법을 배운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여러 모로 중국의 종교적·주술적 설정이 가미되어 있다. 바로 이 점이 서양인 관객들에게는 호기심을, 동양계 혹은 동양인 관객들에게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애니메이션은 영미권에 거주하는 동양계 가족의 정서를 훌륭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확고한 상하관계, 가족을 위해 개인의 바람과 감정을 억누르는 가풍, 그리고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전통에의 복속 강요 등이 동양계 혹은 동양인 관객들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어린이 및 청소년을 주된 시청자로 삼는 작품인 만큼, 분위기는 시종일관 유쾌한 편이다. 특히 메이가 집안 전통의 규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장면에서 더 그렇다. 하지만 간혹 동양적 신비와 엄숙함이 강조되는 지점들도 있다. 레서 판다의 영혼을 봉인하는 의식 중 메이의 정신 내면에 펼쳐진 대나무숲 장면이 그러하다.
◈서양에 선보이는 중국 종교: 신선도가 가르치는 인간과 기(氣)
사실 동양인들 입장에서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이런 동양적인 신비의 분위기와 정서가 서양인들 사이에서는 항상 컬트적인 혹은 매니아적인 인기를 얻는다. 그들 입장에서는 낯설게 느껴지는 중국 식의 영적 세계에 대한 표상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기독교적 영혼이해나 내세관에 비해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에서 엿볼 수 있는 중국의 전통적인 영혼론은 고유하고 특이하다. 중국의 영혼 이해를 가장 오래 좌우했던 사상은 도교사상이다.
불교도 오랜 세월 중국의 영혼론 형성에 영향을 주었지만, 엄밀히 따지면, 불교는 네팔에서 발흥하고 인도에서 크게 확산된 외래종교이다. 반면 도교는 중국 전통의 사상으로부터 유래되었다. 노자와 장자의 도가 사상이 종교로 변모한 것이 도교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영혼 이해는 도교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삼는 가운데, 불교나 무속의 가르침을 이리저리 가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후에 성리학으로 집대성된 유교 역시 기본적으로 영혼이나 내세에 관한 가르침에 있어서는 중국의 전통적인 조상숭배 사상과 도교의 음양이론을 기본 바탕으로 삼는다.
도교의 존재론은 기(氣) 사상을 바탕으로 성립되어 있다. 자연 만물은 모두가 태극과 음양의 원리에 따라 운행하는 기의 변형태로 여겨진다. 기는 감각될 수 있는 물질 형태로도 존재할 수 있고, 물질의 형태가 없는 순수한 기의 상태로도 존재할 수 있다.
도교에서 보는 인간의 존재 또한 기 사상을 바탕으로 설명된다. 인간과 동물 모두 육체가 살아있을 때는 물질적인 몸(體)과 기가 공존하는 상태이지만, 육체가 죽으면 그 사람의 기운이 소멸될 때까지 순전한 기의 상태, 즉 영혼의 상태로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그 기간은 기운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결국에는 혼비백산의 결말을 맞게 된다.
도교는 이런 혼비백산을 피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종교이다. 기의 크기를 늘리고 질을 높여 육체를 아예 순수한 기와 일치된 상태로 만드는 것, 그래서 인간을 영원히 존속시키는 힘을 얻는 것이 도교, 그 가운데서 특히 신선도의 목표이다.
이처럼 만물이 궁극적으로 기로 이루어져 있고, 살아생전 이 기의 양과 질을 높여야 영생 불멸할 수 있다는 신선도 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몸과 영혼에 다른 기운을 받아들일 것을 권장한다.
특히 조화로운 자연의 기운을 몸에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유익한 일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우화등선을 위해 평생 기운이 충만한 곳에서 그 기운을 받아들이고 잘 다스리는 도행(道行)을 정진하도록 권고한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에서 메이의 모계 쪽 선조인 선이 레서판다의 영혼을 받아들인 것은 자연의 기운과 힘을 받아들여 자신의 존재 능력을 강화하고 지속시키려 하는 신선도 사상이 반영된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운’을 이어받은 선의 후손들 역시 레서판다로 변화되는 능력을 갖는다는 설정 또한 도교적이다.
물론 이 애니메이션은 서양인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레서판다로 변한 상태를 매우 귀엽고 코믹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사상은 중국에서 유구한 전통을 가진 종교적 영혼론이다. 이는 이 애니메이션을 연출한 감독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을 연출한 도미 시(Domee Shi) 애니메이션 감독은 중국 충칭시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캐나다로 이민을 온 인물이다. 이 작품은 그녀의 성장기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다. 설정과 서사로 봤을 때, 그녀가 중국 전통 종교문화와 전설 등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미 시 감독은 이런 중국 고유의 종교문화를 콘텐츠의 매력으로 녹여내는 법을 잘 알고 있다. 그 덕분에 이 작품이 서양인 시청자들에게는 낯선 매력으로, 동양계 혹은 동양인 시청자들에게는 익숙한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