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이 어떻게 믿음에 이르는가?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복음 전도는 어떤 의미인가? 이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결단을 하여 구원을 받으라’는 뜻인가? 죄로 죽은 인간은 그리스도를 향해 그런 결단을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인간의 실상과 한계를 진술한 것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는 말씀이다. 이는 죄로 죽은 절망적인 죄인이 어떻게 구원에 이르는가를 보여 준다.
죄로 죽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자가 어떻게 아들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해 살아나는가? 그것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죽은 자의 귀를 열어 그에게 들려지고 성령으로 믿음이 부어짐으로서 이다. 여기엔 인간의 어떤 선제적인 행위나 자의적인 결단 같은 것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복음 전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택정된 자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에의 부르심(calling to salvation)’이고, ‘믿음’은 도무지 거부할 수 없게 하는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에 대한 택자(the chosen)의 ‘응답’이다. 다음의 말씀은 그러한 믿음의 ‘수동성(passivity)’원리를 말한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4-17)”.
요약하면, ‘믿음’은 전도자가 전해주는 복음에 전적 의존돼 있으며, 그렇다고 그것을 듣는 모두가 다 믿는 것은 아님을 말한다. 오히려 죄인은 복음을 들어도 믿지 않는 것이 정상이며(롬 10:16, 롬 3:11), 하나님이 그들을 거듭나게 하여 그들의 의지를 복종시킨 자들만 믿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믿음’은 전적 무능한 죄인에게선 나올 수 없는 ‘삼위 하나님의 역사(役事)’의 결과물이고 ‘선물(엡 2:8)’이다. 침례교회들이 설교단 앞에 ‘회심의 자리(the seat of penitence)’라는 것을 만들어 그곳에서 초심자(初心者)의 신앙 결단을 유도하는 일을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이 비판한 것도, 그것이 믿음을 인위적인 것으로 변질시킨다고 본 때문이다.
혹자는 ‘마음의 진실’을 강조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전적 타락한 죄인에겐 부적절한 어법이다. 부패한 죄인에게 ‘진실한 마음의 믿음’같은 것은 없다.
아니 ‘믿음’은 인간의 진실함과 무관하다. ‘믿음’은 ‘진실한 마음’의 산물이 아닌 ‘성령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구원에의 부르심을 받은 택자(the chosen)가 복음을 듣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는다.
사도 바울이 ‘믿음’에 ‘성령으로의 믿음(faith through the Spirit, 갈 5:5)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도 이 때문이다. ‘믿음’은 인간 마음에서 나온 자연산(The Natural products)은 없고, 오직 성령산(The Spirit products)만 있다. 죄인은 ‘진리의 복음’을 ‘성령으로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을 아는 전도자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의지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권면할 뿐이다. 이 권면을 받을 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을 것(행 13:48)”이고 불택자는 믿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유효적 부르심(effectual calling)’을 받은 자와 ‘일반적 부르심(general calling)’을 받은 자가 나뉜다.
◈‘진심과 열심’이 아닌 ‘복음 신앙’으로 얻는 구원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진심·열심’과 동일시한다.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 ‘지성(至性)이면 감천(感天)’‘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진심’이나 ‘열심’이 ‘믿음’을 대신할 수 없으며, 그것들이 구원을 주지도 못한다.
오직 ‘성령으로의 믿음(faith through the Spirit)’이라야 참된 믿음이고, 그 믿음만이 죄인을 구원한다.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진심과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예수님 당시 유대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아무도 그들의 그것을 따를 자가 없었다.
그들 그룹에 속했던 사도 바울 역시 ‘진심과 열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였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을(빌 3:6)”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한 ‘진심과 열심’이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다(롬 10:2)”고 한 말은 그들의 열심이 ‘복음 진리’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말이고, 그런 왜곡된 열심이 자신들을 구원하지 못했다.
사도 바울이 이단들을 향해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10)”고 한 것도 ‘복음의 진리’와 무관한 그들의 ‘진심과 열심’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고 하신 말씀 역시 구원은 인간의 ‘진심’과 ‘열심’으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 곧 ‘복음’에 의존 됐다는 말이다.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복음을 듣는 것’이다. 그것을 들을 때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성령으로의 믿음(faith through the Spirit)’을 일으켜, 구원 역사를 이루신다.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 곳엔 ‘성령으로의 믿음’도 ‘구원’도 없다.
그리고 ‘성령으로의 믿음’을 낳는 ‘복음’의 내용은 베드로가 고백한 ‘주(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이다. 그 뜻은 ‘예수를 내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뜻이다.
이 베드로의 고백에 예수님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하신 것은 그의 믿음의 출처가 베드로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말한 것이고, 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믿음’이 곧 ‘성령으로의 믿음’이다. 이 ‘성령으로의 믿음’에 ‘천국 입성’을 약속하셨고, 그것을 교회의 기초로 삼으셨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의 속성은 그것을 믿지 않는 불신자가 자가 받을 심판이 어떤 것인가를 유추케 한다. 무지한 인간들은 ‘종교 교리를 안 믿는다고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기독교는 너무 잔인하다’고 불평한다.
이는 ‘믿음(불신)’을 대수롭지 않은 ‘인간의 일’로 여긴 데서 나온 생각이다. ‘믿음(불신)’은 인간의 일 그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구원에의 초대를 거부하는 하나님에 대한 ‘악심(惡心, 히 3:12)’이다.
또 그것은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죄(히 12:29)”이고,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성령의 호소를 거부하는 ‘성령 훼방 죄(막 3:29)’이다.
불신은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대죄이기에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가 임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